인물한국사

정치적 균형과 자유로운 문학을 추구한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

히메스타 2016. 7. 26. 15:30

일러스트

많은 사람들에게 유몽인(, 1559~1623)은 [어우야담()]의 저자로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 ‘야담’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저서로, 다채로운 내용과 자유로운 문체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허균()이나 김만중()이 국문학사를 벗어나면 [홍길동전]과 [구운몽]의 저자보다는 당시의 핵심적 신하로 먼저 인식되는 것처럼, 유몽인도 최초의 야담집을 지은 뛰어난 문학가이기에 앞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 관원이었다.

유몽인의 생몰연대는 그가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30대 초반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광해군의 시대에 주로 활동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정보에서 그의 죽음이 인조반정에서 기인한 인위적인 사건이 아닐까 추측했다면, 그것은 옳았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뛰어난 인물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당쟁으로 희생되었던 것처럼 유몽인 또한 그런 비운을 겪었다.

장원으로 급제한 뛰어난 재능

유몽인은 자가 응문(), 호는 어우당()ㆍ간재()ㆍ묵호자(), 시호는 의정()이다. [어우야담]에도 사용된 ‘어우’라는 다소 독특한 호는 [장자()] <천지()>에 나오는 말로 ‘과장해 속이거나 아첨한다’는 뜻이다. [장자]에는 공자를 조롱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 표현은 늙은 농부가 “공자는 넓은 학문으로 자신을 성인에 빗대고, 허황된 말로 백성을 속이며, 홀로 슬픈 노래를 연주해 천하에 명성을 파는 사람이 아닌가?(, , , )”라고 비판한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유몽인은 문장의 규범으로 [장자]를 매우 존중했는데, 공자를 정면으로 비판한 대목에서 자호()를 가져온 것은 그의 세계관을 깊이 비춰준다.

유몽인의 본관은 전라남도 고흥()으로, 그의 가계에서 주목할 사항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 훈신인 신숙주(, 1417~1475)와의 관련이다. 먼저 아버지 유탱()은 주부(簿, 종6품)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참봉 민위(, 본관 여흥)의 딸이다. 조부 유충관()은 사간(종3품)을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는데, 그의 장인 이조판서 신공제(, 본관 고령)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의 손자였다. 그러니까 유몽인의 집안은 외가 쪽으로 신숙주의 집안과 연관된 것이었다. 증조부 유의()도 이조참판과 제학(, 이상 종2품)의 고관을 지냈다.

유몽인은 명종 14년(1559) 11월 한양 남부() 명례방(, 지금 남대문로ㆍ을지로ㆍ명동ㆍ충무로 일부)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세 형은 유몽사()ㆍ유몽표()ㆍ유몽웅()인데, 각각 사자ㆍ표범ㆍ곰에서 이름을 딴 것이 독특하다. 유몽인의 이름도, 12지의 하나인 데서 알 수 있듯이, 호랑이를 상징했다.

유몽인은 8세(명종 22, 1567) 때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겪었지만,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보이면서 당시 양반의 출세 경로를 순조롭게 밟아갔다. 그는 14세(선조 6, 1573) 때 판관(, 종5품) 신식(, 본관 고령)의 딸과 혼인했고, 23세(선조 15, 1582) 때 사마시(소과)에 합격해 그 뒤 좌의정을 역임하고 조선 후기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 1564∼1635)와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했다(선조 18, 1585). 4년 뒤인 30세(선조 22, 1589) 때는 증광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는 뛰어난 경력을 이뤘다.

이듬해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벼슬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정9품)ㆍ형조 낭관(정5~6품)ㆍ강원도 도사(, 종5품)ㆍ홍문관 수찬(정6품) 등을 지냈다. 처음 입사했지만 상당히 높은 관직에 배속된 까닭은 장원으로 급제했기 때문인데, 조선시대에 그런 인물은 하위 품계를 뛰어넘어 종6품부터 임용되는 특혜를 누렸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외교적 활약

유몽인은 순조롭게 출세하고 있었지만, 나라에는 커다란 국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원 급제라는 출중한 경력이 알려주듯이 그는 뛰어난 문학적ㆍ학문적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사신 응대나 문서 작성 등과 관련해 외교에서 매우 중시되는 재능이었다. 유몽인이 주로 활동한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광해군 때의 대청 관계처럼 중대한 외교적 현안이 많았다. 그의 능력은 이런 사안에 대처하는 데 자주 발탁되었는데, 중국에 세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오는 독특한 이력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첫 사행은 입사한 직후인 32세(선조 24, 1591) 때 질정관(, 특수한 문제를 질의하거나 해명하는 임무를 맡은 사신의 하나)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를 넘겨 이 사행이 귀국할 무렵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젊은 신하로서 유몽인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우선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호종한 뒤 이듬해(선조 26, 1593)부터는 명과의 외교 업무에 투입되었다. 명이 참전한 뒤 그들과의 접촉은 빈번하고 중요해졌는데, 유몽인은 이정구ㆍ신흠()과 함께 당시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그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유몽인은 문안사(使)로 임명되어 개성에서 명의 제독 이여송()과 경략 송응창()을 응접했다. 특히 송응창은 병부 우시랑()으로 양명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어서 조선의 학사()들과 학문을 강론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는데, 유몽인은 이정구ㆍ황신() 등과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발탁되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임진왜란에서는 국왕 선조보다 세자 광해군의 활약이 훨씬 눈부셨다. 전란 동안 유몽인은 주로 세자를 호종하면서 삼도순안어사(, 1595)ㆍ함경도 순무어사(, 1597)ㆍ평안도 순변어사(, 1598) 등으로 파견되어 해당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선조 29년(1596. 37세) 겨울에는 진위사(使)의 서장관()으로 두 번째 중국 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전란이 끝났을 때 유몽인은 40대에 접어들었고 선조가 승하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지냈다.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선조 32. 1599)ㆍ홍문관 교리ㆍ전한(1602)ㆍ동부승지(1603. 44세)ㆍ우승지(1604)ㆍ대사성ㆍ예조참의(1605)ㆍ대사간(1607)ㆍ도승지(1608) 같은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고, 외직으로는 경기도 암행어사(1603)ㆍ황해도 관찰사(1606) 등으로 나갔다. 외교 업무로는 요동도사() 연위사(使)로 의주에 가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명 사신 주지번()을 접대하기도 했다(1606).

이제 유몽인은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원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의 50대에 걸쳐 있는 광해군의 치세는 그에게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지만, 불행한 죽음의 그림자가 숨겨진 기간이기도 했다.

영화와 실각

앞서 썼듯이 유몽인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수행하면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의 능력은 광해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뒤에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몽인의 당색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당파적 색채가 짙지 않은 중북()이었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이런 정치적 성향은 그의 자유로운 문학적ㆍ사상적 태도와도 관련된 결과로 평가된다.

거대한 전란은 끝났지만 당쟁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때의 가장 큰 원인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선조의 후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결정된 상태였지만, 선조 39년(1606)에 적자인 영창대군(, 1606~1614)이 태어나면서 미묘한 기류에 휩싸였다. 특히 영의정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광해군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다.

2년 뒤 즉위하기까지 광해군은 수많은 곡절과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런 과정에서 유몽인은 결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교롭게도 그는 선조가 승하하기 나흘 전(선조 41년〔1608〕 1월 28일)에 국왕의 가장 측근인 도승지로 임명되었는데, 각 당파의 이해가 어지럽게 충돌하는 긴급한 국면에서 광해군이 왕위를 그대로 이어받는 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런 수훈으로 유몽인은 광해군의 치세가 시작된 뒤 더욱 순조롭게 출세했다. 우선 광해군이 즉위한 뒤 명 만력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使) 겸 사은사에 임명되어 세 번째로 중국에 다녀왔다(광해군 1, 1609, 50세). 아울러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영양군()에 책봉되고(광해군 5, 1613, 54세) 한성부 좌윤(광해군 6)과 대사간을 거쳐 인사를 담당하는 핵심 관직인 이조참판 겸 양관() 제학(, 광해군 7)으로 3년이나 재직했다.

그러나 유몽인의 영화는 길지 않았다. 실각의 계기는 수많은 인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광해군 때의 가장 큰 논란인 인목대비(, 1584~1632) 폐비 문제였다. 광해군 10년(1618) 정인홍()ㆍ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인 대북()은 폐비론을 제기했는데, 북인이었지만 중립적 위치에 있던 유몽인은 거기에 반대했다. 대북은 그가 은혜를 온전히 하자고 주장하면서 원수를 잊고 역적을 비호했으니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몽인은 즉시 사직했고, 5년 뒤 사사될 때까지 은거하거나 유람하면서 글을 썼다. [어우야담]은 이때의 산물이었다.

인조반정, 그리고 처형

유몽인은 59세의 나이로 사직한 뒤 서강(西)의 와우산()과 도봉산 북폭포동()에 초가집을 짓고 우거하다가 4년 뒤에는 금강산에 들어가 유점사()ㆍ표훈사() 등에 머물렀다(광해군 14〔1622〕, 63세).

유몽인은 표훈사에서 인조반정(1623년 3월)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64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철원() 보개산()을 거쳐 양주로 왔는데 “옛 군주(, 광해군)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미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술회했다(<보개산을 유람하면서 영은사의 언기ㆍ운계 두 승려에게 준 서문(, ·)>, [어우집] 권4).

그러나 유몽인은 반정이 일어난 지 넉 달만에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623년 8월 5일). 스스로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아들 유약() 때문이었다. 유약은 “훈련도감 대장을 지낸 성우길()이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으니 거사할 만하다”는 무신 정기수()의 말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수하에 아무 군사도 없으면 한 고조나 명 태조라도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지금 너희들이 옛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헛되이 죽을 뿐이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지만 유약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성우길ㆍ정기수 등과 강화도로 가서 거사하려고 했지만, 장마로 성우길의 군사가 모이지 않아 실패했다. 유몽인은 “늦게야 그런 사정을 알고 패역스러운 자식의 행위를 고발하려고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아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은 자신이 지은 <상부탄()>이라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인조 1년〔1623〕 7월 27일). ‘과부의 탄식’이라는 뜻의 그 시에는 그의 정치적 자세가 짙게 투영되어 있다([연려실기술] 23권 <인조조 고사본말> 등 수록).

일흔 된 늙은 과부, 안방을 지키며 홀로 사는데
,
이웃이 개가를 권하며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이라네
, 槿.
여사(궁중에서 글을 맡은 여관〔〕)의 시를 많이 읽고 태임()과 태사(, 각각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로 덕 있는 부인을 상징한다)의 가르침도 익히 아니
,
흰 머리에 화려하게 단장하면 고운 화장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 .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은 인조를, 개가를 거절하는 늙은 과부는 유몽인 자신을 상징하는 이 시에는 반정으로 수립된 인조의 새 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또렷이 담겨 있다. 성호 이익()은 이 시에 관련된 짧은 언급을 남겼는데, 마지막 부분은 그의 말대로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이 시의 뜻은 원()의 양염부()가 지은 <늙은 부인의 노래()>를 본받은 것이다. 명 태조는 양염부를 불러 벼슬을 주면서 [원사()]를 편찬케 했지만, 그가 이 시를 지어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자 석방해 돌려보냈다. 안타까운 사실은 유몽인과 양염부 두 사람이 뜻은 같았는데 일은 다르게 되고 만 것이다.- [성호사설] 29권 시문문() 상부시()

유몽인이 신원된 것은 170여 년 뒤였다. 정조는 그의 문장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의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몽인이 읊은 백주()와 남록()은 실로 천고에 뛰어난 작품이다. 혼조(, 광해군의 치세)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했고, 반정한 뒤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기자헌()은 함께 무고를 당했지만 곧바로 복관되었는데 유몽인은 이런 절개를 갖고도 끝내 거론되지 않았으니, 길재()ㆍ김시습()과 같은 사람을 대우한 성의()가 아니다.- [국조보감] 제74권 정조조 6, 18년(1794)

유몽인의 문학 세계와 [어우야담]

정조의 격찬을 받은 유몽인의 글을 모은 [어우집]은 순조 32년(1832)에 방계 후손인 유금()ㆍ유영무() 등의 노력으로 간행되었다. 장원 급제와 외교적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몽인은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주요 인물은 대부분 관직과 학문ㆍ문학을 겸비했지만, 유몽인은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할 만하다.

유몽인의 [어우야담()]. 자유롭고 다양한 문체로 편찬한 설화문학집으로, 조선 후기 유행한 야담류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출처: 학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앞서 ‘어우’라는 자호에도 투영되었듯이 유몽인의 문학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유교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문장의 전범으로 [좌전]ㆍ[국어]ㆍ[전국책]ㆍ[장자]ㆍ[사기]ㆍ[한서]와 한유()ㆍ유종원()의 문장을 꼽았는데, 이것은 성리학이 나타난 송대 이전에 풍미한 고문()의 정수들이었다. 유몽인은 이 글들을 묶어 [대가문회()]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런 고문과 대척되는 글은 구양수()ㆍ소식() 등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문장이었다. 유몽인은 스스로 “송대의 문장을 불이나 화살처럼 피했다(, )”고 말했다([어우집] 권5 <창주도사 차만리에게 주는 글>).

앞서도 말했듯이 이런 측면은 그의 정치적 자세와도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는 북인이었지만 중립적 위치에서 서인이나 남인과도 개방적으로 교류했다. 금강산의 주요 사찰에 은거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승려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는 천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 불교ㆍ도교와 관련된 것은 200여 수 정도로 알려져 있다.

첫머리에서도 말했듯이 지금까지 유몽인의 이름을 알린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우야담]이다. 그는 실각한 뒤인 광해군 12년(1620, 61세)에 지은 그 책에서 자신이 문장의 전범으로 생각한 [장자]의 우언적() 기법을 사용해 자유롭고 다양한 문체와 내용을 보여주었다. <인륜편>ㆍ<종교편>ㆍ<학예편>ㆍ<사회편>ㆍ<만물편> 등 모두 558편으로 구성된 그 야담들에는 거대한 전란을 겪고 난 뒤 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신분제가 이완되고 있던 17세기의 시대상이 잘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은 ‘떨어질 낙()’자를 싫어한다. 그래서 구운 낙지()가 반찬으로 나오면 ‘입지() 구운 것 먹어도 되겠습니까?’라고 한다([어우야담] 161편)” 같은 부분은 지금 읽어도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을 담고 있다.

끝으로 덧붙일 사항은 그가 경세론에도 상당한 깊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모는 광해군 2년(1610) 가을 무렵 함경감사 한준겸()에게 올린 <안변()32책>에 잘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제목 그대로 변경을 안정시킬 수 있는 32개의 방책을 제시한 그 글에서 그는 변방 백성을 해당 지역에 안정시켜 군병을 확보하는 기반으로 삼고,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며 훈련과 축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두 목적을 이루려면 은광의 개발, 화폐의 사용, 여관과 상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노포(, 길가의 가게)의 설치, 선박ㆍ수레의 사용 같은 경제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세론은 농업을 중심에 두었지만, 그는 주요한 병서인 [육도()]ㆍ[삼략()]ㆍ[손자병법]ㆍ[오자병법()] 등을 크게 참조해 국방과 경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매우 독특하고 참신한 의견을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흔히 글은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느 뛰어난 문필가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글로 숨기거나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지혜(또는 간교함)를 가졌다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글은 그의 본모습을 가장 깊고 은밀하게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유몽인의 자유로운 문체와 [어우야담]의 다양한 내용은 유몽인의 중요한 내면이었을 것이다. 그런 인물이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쓸쓸함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