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 출전하는 선수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 바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이다. 한국에서 쇼트트랙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빅토르 안은 러시아 행을 택했다. 그는 러시아에 귀화했고, 러시아의 국기를 달고 출전하게 되었다. 빅토르 안 선수와 반대로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귀화해온 귀화인(歸化人)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최근까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낸 이참 사장은 원래 독일인이었지만, 한국에 귀화하여 고위직에 올랐다. 방송인으로 유명한 미국 출신 ‘로버트 할리’는 귀화 후 한국인 ‘하일’이 되었고, 국제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된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도 귀화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역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귀화인이 있었다. 고려 광종 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도입한 중국 출신 귀화인 쌍기(雙機, ?~?),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 된 이지란(李之蘭, 1331~1402)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일본 공격에 앞장을 선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조선을 동경한 일본 장수 ‘사야가(沙也加)’
사야가(沙也加 또는 沙也可)는 1571년(선조 4) 1월 3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선조 25)에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게 되었다. 이때,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으며,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런데 그는 불과 며칠 만에 조국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의 장수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에 귀화한 조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왜군 중에는 조선에 투항해 왜군과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칭했다. 항왜는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조총을 비롯한 일본의 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였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사야가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조선을 동경하여 처음부터 투항을 결심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위의 글은 사야가가 남긴 자전적 가사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의 제1단 부분이다. 사야가는 넓디넓은 천하에서 어찌하여 오랑캐의 문화[좌임향ㆍ격셜풍]를 가진 일본에 태어났는가에 대해 탄식했으며, 그래서 아름다운 문물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을 정벌하러 가게 되면서, 그는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사야가는 이 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한번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때, 그는 맹세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결단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의의 나라 조선을 흠모하다가 가토의 선봉장이 되어 출정함에 귀화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후에 그가 조선의 예의(禮義)와 문물을 사모하여 당호를 ‘모하(慕夏)’라고 한 것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모하당기(慕夏堂記)>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을 떠나는 사야가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친척을 이별며 칠(七)형제 두 안을 일시에 다 나니 슬푼 마 셜은 지 업다면 빈말이라"2)라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여러 가족들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사야가는 조선에 귀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꺾지 않았다. 그는 귀화의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며,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의 사람으로 계승하기 위해서였다.3)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술회가(慕夏堂述懷歌)>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녹촌지(鹿村誌)
조선의 장수 ‘김충선(金忠善)’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야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휘하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귀순한 후,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 등을 따라서 경주ㆍ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는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姓名)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사야가가 조선인 ‘김충선’으로 거듭 태어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선조는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씨로 사성(賜姓)하였다4).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충선(忠善)’으로 지어졌다5). 이처럼 임진왜란 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일본 출신 귀화인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성씨와 이름을 부여해 조선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 권했다. 이때, 이름은 충선 이외에 향의(向義: 의를 향함), 귀순(歸順: 순하게 돌아옴) 등으로 정해졌다.
- 서종급(徐宗伋), <사성김해김씨족보구서(賜姓金海金氏族譜舊序)>, [모하당집(慕夏堂集)]
- 이유원(李裕元),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씨족(氏族)
김충선은 왕명으로 벼슬과 성명이 내려지게 되자, 그 기쁨을 <모하당술회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헌계(姿憲階) 사성명(賜姓名)이 일시에 특강(特降)니 어와 성은(聖恩)니야 갑기도 망극다 이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모화당술회가
성은이 망극하여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은혜를 갚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어서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적진을 파멸하고 왕에게 은혜를 갚은 후에 연회를 열겠다고 다짐하였다.
김충선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무기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의 무기를 돌아보니 정밀함이 적어, 이 병기를 가지고서 적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조총과 화포 등 일본의 무기 제조 기술을 널리 전수하여 전투에 활용코자 했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李德馨)ㆍ정철(鄭澈)ㆍ권율(權慄)ㆍ김성일(金誠一)ㆍ곽재우(郭再祐)ㆍ이순신(李舜臣)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조총 등의 보급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를 예로 살펴보자6).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답통제사이공순신서(答統制使李公舜臣書)>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에 화약을 섞는 법은, 지난번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이미 각 진영에 가르쳤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金繼守)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사오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사옵니까.김충선, <통제사 이순신 공께 답하는 글>
이순신이 조총과 화포 및 화약 제조법을 물은 데 대해서 김충선이 쓴 답서이다. 이후에도 김충선은 화포와 조총을 만들어 시험한 후, 각처에 보급하여 전력을 강화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7). 조선으로의 귀화를 받아주고 특별히 벼슬과 이름을 하사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상절도사서(上節度使書)>
66세까지 전쟁터를 누비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전쟁 후에 그는 우록동(友鹿洞)에 터를 잡고 생활했지만, 조정에 변고가 생기면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와 싸웠던 것이다.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두 차례의 호란(胡亂) 등에서 활약했던 김충선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의 충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시기에 김충선은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宜寧)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당시에 왜적 만여 명은 산음(山陰)에서 곧바로 의령으로 내려가 정진(鼎津)을 반쯤 건너고 있었다. 이때, 김충선은 명나라 병사 수십 명과 전사(戰士) 등과 합세해 왜적에게 맞섰다. 조선의 군병은 기세를 떨치며 싸웠으나, 곧 왜적의 습격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군이 마병(馬兵)으로 추격하여 포위를 하자, 조선 군병과 명나라 병사가 함께 포위된 위기 속에서 포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데에는 항왜들의 힘이 컸다. 당시의 전투에서 김충선도 적의 수급(首級)을 베었던 것이 확인된다.
…… 명나라 병사와 항왜 등의 참급(斬級)은 많게는 70여 급인데 분주하게 진퇴하는 동안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으며, 명나라 병사는 두 급을 베고, …… 항왜 동지(同知) 요질기(要叱其)ㆍ항왜 첨지(僉知) 사야가(沙也加)ㆍ항왜 염지(念之)는 각기 한 급씩을 베었다. 그리고 왜기(倭旗) 홍백ㆍ흑백의 크고 작은 것 3면(面)과 창 1병(柄) 칼 15병, 조총 2병,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가 되어 갔던 우리나라 사람 1백여 명을 빼앗아 오기도 하였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 11월 22일(기유)
이 시기에 김충선은 김응서(金應瑞)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면모를 보였다.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왜적의 꾀에 넘어가 명나라 병사를 위험에 처하게 한 김응서를 엄격하게 군율로 다스리려 했다. 그러자 김충선은 자신이 전공을 세우면 김응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군령장(軍令狀)을 보냈다8). 그리고 실제로 3개월 후인 1598년(선조 31) 1월 울산 증성(甑城, 島山城)에서 왜적을 대파하여 일을 무마시켰다.<모화당술회가>에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군령장(軍令狀)>
부분에서 이때의 일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의 주동자 이괄(李适, 1587~1624)은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동원하였다. 당시 이괄의 부장(副將)은 항왜 서아지(徐牙之)였는데, 54세의 김충선은 서아지를 김해에서 참수(斬首)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이를 극구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사용케 하였다9).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김충선(金忠善), [모하당집(慕夏堂集)] 권1, <환사패소(還賜牌疏)>
영장(領將)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복해 온 왜인을 추포(追捕)하는 일을 그 당시 본도의 감사로 있던 자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승정원일기] 1628년(인조 6) 4월 23일(갑인)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김충선은 토병 한응변(韓應卞) 등과 함께 자원군으로 나와 전투에 임하였고, 이로 인해 상당직(相當職)에 제수되었다10).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투장에 나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청나라 병사를 무찔렀다. 22세에 조선에 귀화해 온 이후부터 66세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쟁터에 나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27년(인조 5) 3월 1일(무진).
김충선은 나라에 대한 충심을 자손들에게도 강조하였다. 그는 1600년(선조 33) 인동(仁同) 장씨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여러 자식들을 두었는데, 자손에 훈계하기를 영달(榮達)을 탐하지 말고 효제(孝悌)ㆍ충신(忠信)ㆍ예의ㆍ염치를 가풍으로 삼아 자자손손에게 계속 전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충선은 1642년(인조 20) 9월 30일, 72세의 나이로 경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友鹿) 마을에서 세상을 떠나 삼정산(三頂山)에 장사 지내졌다. 우록마을 입구를 지나면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으며, 서원 뒤에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녹동사가 있다. 서원과 사당은 김충선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지었다. 그의 6대손 김한조(金漢祚)는 김충선의 생애를 정리하고 유작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된 [모하당집(慕夏堂集)]이 그것이다.
이미 우리 역사가 된 귀화인들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해 있다. <출처: Ktneop at ko.wikipedia.org>
김충선처럼 우리나라에 귀화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많다. 과거제도를 고려에 처음 도입하게 한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이지란, 조선 인조대 표류한 후 ‘박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의 화포 개발에 도움을 준 네덜란드 출신의 귀화인 벨테브레 등이다.
귀화인의 역사는 과거 속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사안이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탁구 종목에서는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2007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출신 귀화 선수 당예서(중국명: 唐娜). 중국 탁구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아서 조국을 등지고 결국은 태극 마크를 달았다. 비단 당예서 뿐만이 아니었다. 탁구 국가 대표로 출전한 선수 중에는 싱가포르, 미국 등에도 원래 중국 국적의 선수가 많았다. 수십년 전 프로 축구 대표팀 골키퍼로 명성을 날린 샤리체프도 러시아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 ‘신의손’이 되었다. ‘신의손’은 축구 훈련장이 있던 구리를 본관으로 하여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에도 프로 농구, 프로 축구 등 스포츠 분야에서는 귀화 선수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법무부 추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귀화인은 11만 명을 넘는다. 귀화인이 급증하다 보니 귀화 성씨도 400개 이상이다. 몽골 김씨, 태국 태씨, 독일 이씨, 대마도 윤씨, 길림 사씨, 청도 후씨 등이 등록되어 있다. 귀화인들이 한국식 성을 따르면서 자신의 출신 지역을 본(本)으로 남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외국 출신이지만 한국 국적으로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인물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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