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崔萬理, ?∼1445)라는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평가되는 한글과 상당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불편한 관계다. 널리 알듯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살펴볼 최만리의 삶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의 핵심 관서인 집현전에서 약 25년을 근무해 실질적인 장관인 부제학에 오르고 청백리에도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평가의 주요한 논거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조금 거창한 이야기지만, 학문의 목표는 이미지와 사실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고 그 간격을 될 수 있는 대로 좁혀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그렇게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규명하고, 그것을 공인받는 역정이었다.
최만리와 관련해서도 그에게 덧씌워진 이미지에 부당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지적은 이미 여러 차례 나왔다. 수긍할 만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살펴보면서 아마 그는 시대적 상황에 충실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물론 조선시대 전체를 지배한 기본적인 사상은 성리학이었다. 그것의 기본적 외교 방침의 하나는 사대(事大)다. 뒤에서 볼 최만리의 ‘갑자 상소’의 핵심적 논리는 바로 사대였다. 중세 서양에서 기독교의 원리를 공개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지식인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면 그의 이름에는 ‘이단’이라는 낙인이 뚜렷하게 찍혀 지금까지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사대라는 기본 원리를 부정할 수 있는(또는 그렇게 하려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도 마찬가지다. 다만 세종은 한글 창제가 사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최만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 시대의 조건에 충실했다. 그것은 그의 분명한 한계지만, 대부분의 양반들이 한글 창제 후 오래도록 한글을 천시하며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보편적 한계였음을 또렷이 보여준다. 최만리와 관련해서는 이런 측면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가문적 배경
최만리는 자가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본관은 해주(海州)다. 그의 생년은 명확하지 않다. 해주 최씨는 고려 때부터 내려온 명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 중기에 해동공자로 불린 문헌공 최충(崔冲, 984~1068)이다. 널리 알듯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개경 송악산 아래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로 이름 붙인 구재학당을 만들어 사학(私學)을 융성시켰다. 뒤에 그의 제자들은 최충의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文憲公徒)’로 불렸다. 최만리는 최충의 13대손이다.
해주 최씨는 이후로도 계속 융성했다. 최충의 아들 최유선(崔惟善)도 문과에 급제하고 지공거와 재상을 역임했으며, 그 아들 최사제(崔思齊)도 재상에 올랐다.
그 가문에서 널리 알려진 또 다른 인물은 고려 후기의 최자(崔滋, 1188~1260)다. 최만리의 7대조인 최자는 무신 집권기와 거의 겹치는 시기를 살면서 문하시랑평장사 등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그는 [보한집(補閑集)]을 지어 문학적 명성도 길이 남겼다. [보한집]은 제목 그대로 이인로(李仁老)가 역대 명현의 좋은 글을 모아 만든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한 책이다.
최만리와 시간적으로 가까운 선조들도 일정 수준 이상의 출세를 했다. 증조 최공(崔珙)은 사재령(司宰令. 정3품), 조부 최안해(崔安海)는 한성부윤(2품),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 정4품)을 지냈다. 참고로 사재감은 궁중의 어류ㆍ육류ㆍ소금ㆍ땔나무 등을 공급하고, 예빈시는 종실ㆍ대신ㆍ사신 등의 접대를 맡은 관서다.
최만리의 어머니는 충주 지씨인데 그녀의 아버지, 즉 최만리의 외조는 고려 후기에 상당한 발자취를 남긴 무장인 지용수(池龍壽, ?~?)다. 그는 공민왕 때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수복해 1등공신에 책봉되고 그 뒤 문하시랑 겸 서북면 상원수까지 올랐다. 요컨대 최만리는 오랫동안 성세를 유지한 명문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25년 동안 집현전에서 근무하다
최만리의 공식적 생애는 태종 14년(1414) 생원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다. 4년 뒤 조선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충녕대군에게 전위한 것이다(태종 18년 8월). 그 뒤 세종은 32년 동안 재위하면서 신생국 조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이듬해 4월 새 국왕의 즉위를 경축하는 별시인 증광시(增廣試)가 치러졌는데, 최만리는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4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최만리의 첫 관직은 조선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을 맡은 종부시(宗簿寺)의 직장(直長. 종7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2년(1420) 윤1월에 거기서 근무하고 있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뒤 최만리의 거의 모든 경력은 집현전에서 이뤄졌다. 그는 세종 2년 3월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박사(博士. 정7품)로 임명되어 교리(정5품. 세종 7년)ㆍ응교(정4품. 세종 9년)ㆍ직제학(종3품. 세종 19년)을 거쳐 18년 만에 실질적인 장관인 부제학에 올랐다(세종 20년. 1438). 세종은 집현전에 뛰어난 학자들을 모은 뒤 다른 관서로 옮기지 말고 거기서 오래 근무해 학문을 연마하라고 지시했는데, 최만리는 그런 방침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그의 다른 경력으로는 재직하고 있는 관원을 대상으로 치르는 중시(重試)에서 12명 중 2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급제했고(세종 9년[1427] 3월), 세자의 서연(書筵: 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 좌보덕(종3품)으로 참여한 것이 보인다(세종 14년. 1432). 그는 잠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기도 했지만(세종 21년) 곧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했다(세종 22년. 1440). 그해에는 청백리로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14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 대부분은 불교를 배척하고(6회. 흥천사[興天寺]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 혁파) 세자(뒤의 문종)의 섭정을 보좌하는 관서인 첨사원(詹事院) 설치에 반대하는 내용(3회)이었다. 한글 창제에 반대한 상소는 14번의 많지 않은 상소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가장 민감한 사안을 건드린 것이었다.
한글 창제에 반대한 갑자 상소
최만리의 현실적 삶과 역사적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은 세종 26년(1444) 2월 20일에 일어났다. 그날 그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신석조(辛碩祖, 직제학. 종3품)ㆍ김문(金汶, 직전. 정4품)ㆍ정창손(鄭昌孫, 응교. 종4품)ㆍ하위지(河緯之, 부교리. 종5품)ㆍ송처검(宋處儉, 부수찬. 종6품)ㆍ조근(趙瑾, 저작랑. 정8품) 등 함께 근무하던 아래 관원들과 함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글은 그해의 간지를 따라 ‘갑자 상소’로 불린다.
널리 알 듯 지금 ‘한글’로 불리는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 12월에 창제되었다. 그해의 맨 마지막 실록 기사는 “이달에 주상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만드셨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고 밝혔다. 매우 중대한 사건인 문자의 창제를 알리는 기록이 이렇게 짧고 소략하다는 사실―정확한 날짜도 밝히지 않았다―은 그것이 비밀스럽게 추진된 작업이었다는 방증으로 평가된다.
세종이 추진한 첫 한글 관련 사업은 이듬해 2월 16일, 원 웅충(熊忠)이 엮은 운서인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처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의 이름이 웅변하듯, 한글 창제의 일차적 목표가 현실과 맞지 않는 당시의 한자음을 바로잡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세종은 그 작업을 최항(집현전 교리)ㆍ박팽년(부교리)ㆍ신숙주ㆍ이선로ㆍ이개(이상 부수찬)ㆍ강희안(돈녕부 주부) 등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맡겼다. 이들과 ‘갑자 상소’를 올린 인물의 명단에 그 뒤 세조에게 협력한 주요 대신과 사육신이 함께 섞여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갑자 상소’는 이 지시가 있은 지 나흘 뒤 올라왔다. 최만리 등은 “언문의 제작은 지극히 신묘해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행함이 천고에 뛰어나지만,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의심되는 측면이 있어 뒤에 열거하오니 판단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문장으로 상소를 시작했다. 그들이 ‘의심’한 부분은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2. 몽골, 서하(西夏), 여진, 일본 등은 각기 글자가 있지만 오랑캐니 말할 것이 없다. 지금 언문을 만든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다.
3. 문자 생활은 이두로도 불편하지 않다. 언문을 사용해 그것으로 출세할 수 있게 되면 고생해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4. 형옥(刑獄: 형벌과 옥사)을 공평하게 하려는 목적이라지만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옥리(獄吏)의 자질에 달려 있다.
5. 중요한 일을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된다.
6. 동궁이 성학에 마음 쓸 때인데 언문에 신경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즉 1, 2는 사대에 저촉된다는 우려고, 3, 4는 현실에서도 필요치 않다는 지적이며, 5, 6은 전체적인 상황을 근거로 한 반대였다.
최만리 등은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鄙諺無益之字)”라고 폄하하면서 “지금 이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아 학문을 손상시키고 정치에 이로움이 없으니 거듭 생각해도 옳지 않다(今此諺文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맞서는 세종의 반응 또한 거칠었다.
“지금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 개나 있는가?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한글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이 발언에는 언어학에 관련된 세종의 자부심이 넘친다.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해 상소에 참여한 사람들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다음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하루 만에 풀려났지만 최만리의 공식적 경력은 이것으로 마감되었다. 그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세종 27년. 1445)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별세의 원인이 자연적 요인인지, 낙담이나 한탄 같은 인위적 요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중화(中和) 양씨(양미[楊美]의 딸)와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었는데, 차남 최정(崔埥, 1429~1466)은 단종 2년(1454)에 급제했고, 5남 최연(崔堧, ?~?)은 세조 5년(1459)에 급제하여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 있다.
후대의 평가
20여 년 뒤 세조는 최만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예전 세종대 문종이 세자였을 때 서연관(書筵官) 최만리ㆍ박중림(朴仲林) 등은 세자를 보필하면서 작은 잘못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간언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 두 신하는 그 임무를 다했다고 할 만한데, 우연히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세조 13년[1467] 7월 11일).”
매우 높은 평가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만리와 함께 상찬된 박중림은 대사헌ㆍ대제학ㆍ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로 사육신 박팽년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도 아들과 함께 사육신 사건 때 죽었다. 강력한 정적을 이렇게 높이 평가한 데는 세조의 아량도 작용했겠지만, 이제 그를 둘러싼 정치적인 위협이 현실적으로 사라졌다는 여유도 개입했을 것이다.
아무튼 최만리가 “작은 잘못이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간언”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는 유념할 만하다. 그가 보기에 한글 창제는 사대라는 기본 원리에 저촉되는 것을 포함해 의심할 만한 사항이 여섯 가지나 되는 커다란 잘못이었으니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분명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들의 판단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비판에는 차자(借字) 표기의 방법인 이두로 한글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언어학적 무지도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때 최만리 등의 상소는 신하들 대부분의 생각을 대변한 견해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조선의 지배층이 한글을 천시하며 한자로 문자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은 그런 측면을 또렷이 보여준다. 그러니 최만리의 한계는 그 시대의 보편적 한계에 가까웠다고 생각된다.
최만리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의 수장을 지낸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 지식인도 넘거나 깨닫지 못한 한계 너머를 본 유일한 사람은 위대한 국왕 세종이었다. 한글 창제라는 그의 위대한 업적은 500여 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실험과 도전을 겪었지만, 결국 그가 처음 의도한 방향대로 구현되었다. 지금 서울시 중구 만리동(萬里洞. 한자는 최만리의 이름과 다르다)은 그가 살았던 데서 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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