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명시(絶命詩)>([매천집] 권5)는 모든 글 중에서 가장 비장한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고 말할 만하다.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다(難作人間識字人)”는 마지막 구절은 나라가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 부딪친 지식인의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
생몰년이 보여주듯 황현(黃玹, 1855~1910)은 격동을 거쳐 망국으로 귀결된 구한말의 모든 과정을 살고 지켜보았다. 20대의 청춘부터 별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험난한 근대화를 알리는 개항(1876. 21세)으로 시작되어 임오군란(1882. 27세)ㆍ갑신정변(1884. 29세)ㆍ갑오경장(1894. 39세)을 거쳐 나라의 멸망과 함께 마감되었다.
그의 활동은 다양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쓴 역사가였고, 2천여 편에 이르는 시를 남긴 문학가였으며, 강위ㆍ김택영ㆍ이건창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한 지식인이었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관통한 하나의 면모는 ‘올곧은 지사’일 것이다.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은 초야의 선비였지만, 그의 삶과 글은 당시를 주름잡은 어떤 고관들보다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과 소중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가문적 배경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水)고,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梅泉)이다. 그는 철종 6년(1855)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광양(光陽)에서 황시묵(黃時默)과 풍천 노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 뒤로 남동생 둘(황련[黃璉]ㆍ황원[黃瑗])과 여동생 둘(각각 김하술과 유덕기에게 시집감)이 더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랜 전통을 가졌다. 널리 알려진 조상으로는 멀리 세종 때의 명재상인 황희(黃喜, 1363~1452)가 있다. 10대조 황진(黃進)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해 무민공(武愍公)에 추서되었으며, 8대조 황위(黃暐)도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사간원 정언(정6품)을 지냈다.
그러나 이런 정보에서 예측할 수 있듯 그의 가문은 큰 성세를 누리지는 못했다. 황위 이후로는 현달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고, 집안은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대대로 살았다. 향촌의 양반 가문이 된 것이다.
황현이 태어난 광양으로 이주한 것은 조부 황직(黃樴) 때였다. 그는 남원에서 10여 년 정도 상업에 종사해 가산을 크게 불렸는데, 중요한 성취였지만 당시 양반 신분으로는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낯선 곳으로 이주해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고, 그런 결심에 따라 1850년대쯤 광양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총명한 어린 시절
경제력을 쌓은 황현의 조부 황직과 아버지 황시묵은 후손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집에 1천여 권의 책을 구비해놓고, 자기 자식들은 물론 인근의 아이들도 모아 가르쳤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 그는 두어 살 무렵부터 숯 조각으로 담장에 무언가를 그렸는데 마치 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면서는 한번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황현의 스승은 왕석보(王錫輔, 1816~1868)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본관이 개성으로 자는 윤국(允國), 호는 천사(川社)며 경학과 시문에 뛰어났다. 황현은 그의 아들 왕사각(王師覺)ㆍ왕사천(王師天) ㆍ왕사찬(王師贊)과도 친구로 지냈다.
왕석보는 황현이 11세 때 쓴 시를 보고 매우 놀라면서 “훗날 반드시 훌륭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스승의 안목은 적중했다. 황현은 나중에 중요한 역사서를 쓴 인물답게 [통감강목]을 좋아했다.
그는 15세 때인 고종 7년(1870) 해주 오씨와 혼인했고, 그 뒤 슬하에 2남(황암현[黃巖顯]ㆍ황위현[黃渭顯]) 1녀(안병란[安秉蘭]에게 시집감)를 두었다. 이 무렵 황현은 장성에 거주하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찾아가 뵙기도 했다. 노년의 대학자는 젊은 인재에게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실력을 닦아 온 세상에 그것을 펼치라(一念勤栽培, 放之四海準)”는 격려의 시를 주었다([노사집] 권2, <황현에게 주다(贈黃玹)> 3수 중에서).
상경과 교유
황현은 태어난 광양과 30대 초에 이주한 구례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그러나 20대에는 서울로 올라와 견문과 교유를 넓히기도 했다. 그 시절 그는 강위(姜瑋, 1820~1884)ㆍ김택영(金澤榮, 1850~1927)ㆍ이건창(李建昌, 1852~1898) 등 뛰어난 인물들을 만나고 깊은 친교를 맺었다.
먼저 35세 연상의 강위는 뛰어난 시인이자 개화사상가였다. 그는 박규수ㆍ김옥균 등과 교유하면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섯 살 위의 창강(滄江) 김택영 또한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그는 40대 중반 편사국 주사(編史局主事. 고종 31[1894])ㆍ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고종 32) 등의 관직을 지냈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자 3년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장강(長江) 하류의 난퉁(南通)에서 출판사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한문학의 정리와 평가, 역사 저술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고려부터 당시까지의 뛰어난 문장가 9명의 작품을 모은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와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ㆍ[한사경(韓史綮)]ㆍ[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의 역사 저술, [창강고(滄江稿)]ㆍ[소호당집(韶濩堂集)] 등의 문학 저술이 있다.
세 살 위의 영재(寧齋) 이건창은 어리다고 할 만한 나이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는 15세(고종 3년. 1866) 때 문과에 급제하고 22세(고종 11년. 1874) 때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의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1년 동안 유배되었다.
조정의 비리를 실감한 그는 크게 실망했고, 이후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 뒤에도 경기도 암행어사ㆍ승지 등 이런저런 관직을 잠깐씩 지냈고, 갑오경장 이후 각부의 협판(協辦)ㆍ특진관(特進官) 등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 뒤 그는 고향인 강화로 내려가 저술에 몰두하다가 47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ㆍ[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특히 [당의통략]은 당파를 벗어나 공정한 시각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서술한 저서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앞서 말한 김택영이 펴낸 [여한구가문초]에서 마지막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참고로 나머지 8명은 김부식ㆍ이제현ㆍ장유ㆍ이식ㆍ김창협ㆍ박지원ㆍ홍석주ㆍ김매순이다. 그 뒤 그 책은 김택영의 제자인 왕성순[王性淳]이 김택영을 포함시켜 [여한십가문초]로 다시 펴냈다).
김택영과 이건창은 한말 양명학의 주류인 강화학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목표가 알려주듯 실천을 중시한 학문이다. 황현의 삶은 그 명제를 온전히 구현했다고 할 만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
한말의 순국지사이자 문장가 매천 황현의 초상. 대한제국기 전후 최고의 초상화가로 일컬어지는 채용신(蔡龍臣)이 그렸다.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 일찍이 황현이 1909년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에서 찍어두었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준다. 가로 72.8cm, 세로 120.7cm 크기로,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앞서 말했듯 1876년 조선이 개항했을 때 황현은 21세였다. 그 뒤 그가 40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에는 임오군란ㆍ갑신정변ㆍ갑오경장 등 커다란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황현은 평생 벼슬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는 28세(고종 20. 1883)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다. 보거과는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다. 그는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에 두었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그 뒤의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3년 뒤 황현은 가족과 함께 구례로 이주했다(고종 23. 1886). 그곳에는 스승 왕사각이 거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2년 뒤 황현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다시 상경해 생원시에 응시했고 장원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그의 공식적 경력은 여기까지였다. 33세의 생원은 갑신정변 이후 나타난 정치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하고 1890년에 다시 구례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구안’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정도의 의미다. 매천이라는 자호도 이때 나왔다. 그는 거처의 샘가에 매화를 심고 그 자호를 지었다.
구안실은 황현 문학과 학문의 산실이었다. 그는 16년 정도 거기 살면서 1천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음풍농월(吟風弄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김)보다는 절의를 지킨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주로 읊었다.
시대는 더욱 험난해졌다. 구안실을 지은 4년 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격동의 해라고 할만한 1894년이 다가왔다. 황현은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경장ㆍ청일전쟁이 잇따라 폭발하는 격동을 바라보면서 당대사를 저술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했다.
나라는 점점 더 기울어만 갔다.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소식을 들은 황현은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과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때 그는 ‘변고를 듣다’는 뜻의 <문변(聞變)> 3수를 지었다. 그 세 번째 작품은 이렇다.
열수(한강)도 소리 죽이고 백악산도 찡그리는데 洌水呑聲白岳嚬
속세에는 여전히 벼슬아치들이 넘치네 紅塵依舊簇簪紳
역대의 간신전을 한번 보게나 請看歷代姦臣傳
나라를 위해 죽은 매국노는 한 사람도 없으니 賣國元無死國人
1907~1908년에 황현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생각에서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호양학교(壺陽學校,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소재)를 세우기도 했다.
황현의 학문 세계
황현은 평생 공부하고 글을 쓴 학자였다. 양명학이라는 사상적 기반과 [매천야록]처럼 당대를 생생히 다룬 저작이 보여주듯, 그의 학문은 현실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대체로 황현의 사상적 위치는 실학을 계승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가까우며, 보수적인 위정척사론이나 근대적인 개화사상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고 평가된다.
앞서 말했듯 그는 역사서를 즐겨 읽었고 시의 주제도 역사에서 가져온 것이 많았다. 그가 존경한 인물은 정약용과 박지원이었다. 그는 정약용의 학문은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하며 유형원ㆍ이익의 그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평가했으며([매천야록] 권 1) 박지원의 문장은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의 현실성이 뛰어나다고 상찬했다([매천집] 권 6, <연암속집 발문>). 이런 측면은 그가 실학과 상당한 친연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 개화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한 상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는 별다른 게 아니라 문물이 바뀌고 사람이 교화되는 것〔開物化民〕을 말하는데, 문물이 바뀌고 사람이 교화되는 것이 근본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재정을 절약하며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 등이 바로 이른바 근본이며, 군대를 훈련시키고 기계를 활용하며 통상(通商)을 잘하는 것 등이 바로 이른바 지엽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법이 중국과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저들의 이른바 만국사(萬國史)를 살펴보면, 그들의 흥성 또한 근본을 바로 세운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참으로 그 근본이 없으면 아무리 강해도 반드시 피폐해지는 법이니, 이것은 흥망의 자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개화는 처음 듣는 말이지만 사실 중국의 치도(治道)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매천집] 권7, <언사소(言事疏)>
그러나 ‘동도서기’(조선)ㆍ‘중체서용’(중국)ㆍ‘화혼양재’(일본) 같은 근대 동아시아 삼국의 유사한 명제가 보여주듯, 동양의 고유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 문명을 이분한(또는 그러려고 애쓴) 태도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지식인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근대사의 생생한 기록, [매천야록]
[매천야록]은 <절명시>와 함께 황현의 이름을 지금까지 남기는 데 주요하게 기여한 저작이다. 그 책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까지 47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다. 6권 7책 중 고종 1~30년이 1책 반인데 견주어 갑오경장 이후인 나머지가 5책 반이라는 사실은 그가 갑오경장 이후의 역사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내용과 형식도 그런 측면을 보여준다. 갑오경장 이전은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거나 연대가 뒤바뀐 사건도 적지 않지만, 그 이후는 날짜에 따라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한 형식은 없고 분량 또한 항목에 따라 자유롭게 기술했다.
황현은 자신의 직접적인 견문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주요 내용으로는 고종ㆍ명성황후ㆍ대원군ㆍ안동 김씨ㆍ여흥 민씨 등 주요 정치 세력의 동향과 문제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침탈, 민족의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그는 대원군은 공로와 잘못이 절반씩이라고 평가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매천야록]은 구한말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황현을 추모한 글들
매천사(梅泉祠)는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그가 생전에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웠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 위치해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앞서 말했듯 황현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날짜는 8월 7일인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9월 10일이다. 독약이 아니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황현을 다룬 주요한 전기인 박문호의 <매천 황공 묘표>나 아래에서 인용한 김택영의 <본전>에서는 모두 독약이라고 썼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것을 따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오랜 친구들은 그를 추모한 글을 많이 남겼다. 특히 김택영의 글은 황현의 풍모를 핍진하게 보여준다.
황현은 어느 날 저녁 <절명시> 4장을 짓고 자제들에게 글을 남겼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맞아 한 사람도 국난(國難)에 죽지 않는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참으로 통쾌할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 글을 다 쓰고는 바로 독약을 마셨는데, 다음 날에야 가족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우 황원이 급히 달려가 보고는 할 말이 있는지 묻자 황현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다만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입을 댔다 뗐으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인가?”
곧 이윽고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일찍이 노씨(盧氏)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는데, 늘 황원에게 “국난에 죽을 사람은 반드시 네 형일 것”이라고 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황현은 너른 이마에 눈썹은 성기고 눈빛은 초롱초롱하되 근시(近視)인 데다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사람됨은 호협(豪俠: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음)하고 쾌활하고 바르고 강직해 악인(惡人)을 원수처럼 미워했다. 기개가 높고 오만해 남에게 굽혀 따르지 않았으며, 출세한 무리의 교만한 태도를 보면 그 면전에서 잘못을 꾸짖었다.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유배되거나 죽으면 천리 길이라도 달려가 위문했다. 옛글을 읽다가 충신ㆍ지사(志士)가 원통하게 어려움을 겪으면 늘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학문은 정통했고 시속(時俗)의 진부한 학자들과는 사귀지 않았다. 역대의 사서에 기록된 치란성쇠(治亂盛衰)의 자취부터 군사ㆍ형법ㆍ재정에 이르기까지 연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서양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술에도 마음을 두어 당세의 어려움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문장에서는 시에 더욱 조예가 깊어 소식(蘇軾)ㆍ육유(陸游, 1125~1210. 송대의 시인)의 기풍이 있었다. 그가 작고한 다음 해에 호남과 영남의 선비들이 돈을 걷어 [매천집]을 간행했다.- [매천집] 권수(卷首), <본전[本傳]>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죽는다”는 결의와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입을 댔다가 뗐다”는 고백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래도 두려움을 어쩔 수 없는 인간적 고뇌를 깊이 보여준다. 이 글을 쓰면서 그의 모습이 담긴 유명한 사진과 초상화를 여러 번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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