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위정척사론을 실천한 최고령 의병장, 최익현

히메스타 2016. 7. 20. 15:11

 

일러스트

서양이 이끈 근대의 격랑이 덮쳤을 때 동아시아는 크게 동요했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벗어나 그 물결에 합류한 것은 일본이었다. ‘근대’라는 밝은 빛은 ‘전쟁과 파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다녔다. 유사 이래 분쟁이 없던 때는 없었지만, 엄청나게 발달한 기술 문명에 힘입어 수행된 근대의 분쟁은 그 지역적 범위와 파괴력의 강도에서 이전을 압도했다.

점차 노골화한 일본의 침략에 맞선 조선의 대응은 크게 위정척사론개화론, 그리고 동도서기론으로 나뉘었다. 최익현(, 1833~1906)은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지주이자 실천적 활동가였다. ‘위정척사()’란 말 그대로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것은 그동안 조선을 지배해온 성리학적 질서고, 사악한 것은 서양과 일본의 모든 문명을 가리켰다.

지금 보면 이 주장을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현실은 이 주장과 반대로 구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시대적 조건과 한계 속에서 구현된다. 대표적으로 중세 동양과 서양의 유교와 기독교는 그때 온 세상의 이치를 자명하게 설명하는 불변의 진리였다. 그러나 지금 보면 거기에는 그 자명함만큼이나 거대한 무모함과 완고함도 있었다.

그 모순점을 냉철히 비판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것은 그 역할과 한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때도 끊임없이 진행된 역사의 흐름과 사람들의 삶을 생략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로 얼룩진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출생과 성장

최익현은 자가 찬겸()이고 호는 면암()이며 본관은 경주()다. 그는 순조 33년(1833)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최대()와 경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최극경(), 증조부는 최광조(), 외조부는 이계진()이다. 그의 생애를 소상히 기록한 연보([면암집] 부록 1~4권 수록. 이 글을 쓰는 데 많이 참고했다)에 조상에 관련된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시기의 직계에서는 현달한 인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상쟁이는 어린 그를 가리켜 “호랑이 머리에 제비 턱()이니 한없이 귀하게 될 상”이라고 말했다. 부모는 아명을 ‘기남()’이라고 지었다.

최익현의 가문은 그가 3세 되던 해(헌종 2. 1836) 충청북도 단양으로 이주했다. 3~4년 전 큰 흉년으로 집안 살림이 기울었고 세상도 뒤숭숭했기 때문이었다. 최익현은 5세(헌종 4. 1838)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모두 기억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이항로에게 배우다

최익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만남은 그의 나이 13세(헌종 12. 1846) 때 이뤄졌다. 그해 봄 대학자 화서(西) 이항로(, 1792~1868)를 벽계(. 현재 경기도 양평군)로 찾아가 배우게 된 것이다.

이항로는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조선 말기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이항로의 생가이자 학교인 벽계의 청화정사()는 그 뒤 위정척사론을 이끈 인물들의 산실이었다. 최익현을 비롯해 중암() 김평묵(, 1819~1891)ㆍ의암() 유인석(, 1842~1915) 등이 모두 여기서 배출되었다.

54세의 이항로는 최익현을 한번 보고는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성심으로 가르쳤으며 손님이 오면 “이 아이는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고 말하면서 아꼈다. 그는 최익현에게 ‘낙경민직()’ 네 글자를 써주며 격려했다. ‘낙’은 낙양()의 정자()로 거경궁리(. 경건하게 이치를 궁구한다)를 주장했고, ‘민’은 민중()의 주자()로 경이직내(. 경건하게 내면을 바르게 한다)를 중시했다는 의미다. 즉 성리학의 정통을 이으라는 격려였다. ‘면암’이라는 호도 이항로가 지어준 것이다.

최익현은 17세(철종 1년. 1850) 때 스승을 모시고 설악산을 유람했는데, 그때 지은 시가 남아 있다(<연보>).

동쪽의 절경이라고 들은
최고의 명산 설악
멀리 스승을 모시고
산골 깊이 찾아왔네

최익현은 19세(철종 3. 1852) 때 청주 한씨와 혼인했고, 21세(철종 5) 때는 온 집안이 포천으로 돌아왔다.

관직에 나아가다

최익현의 공식적 생애는 포천으로 돌아온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22세(철종 6. 1855)의 젊은 나이로 급제했다. 스승 이항로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하니 부모에게 효도하던 마음으로 임금에게 충성하라”고 격려했다.

최익현은 이때부터 30대 중반까지 승문원 부정자(종9품)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철종 7. 1856. 23세)ㆍ사헌부 지평ㆍ사간원 정언(이상 철종 10. 1859. 26세)ㆍ이조정랑(철종 11. 27세)ㆍ충청도 신창()현감(철종 13. 1862. 29세)ㆍ예조좌랑(고종 1. 1864. 31세)ㆍ성균관 직강(고종 2. 32세)ㆍ사헌부 장령(고종 5. 1868. 35세) 등의 관직을 거쳤다.

첫 번째 시련

그 뒤의 상소와 행동이 보여주듯, 최익현은 불의라고 판단한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파직과 유배 같은 이런저런 곤경과 불이익으로 이어졌다.

첫 사건은 그가 신창현감으로 있을 때 발생했다. 철종 13년(1862)에 부임했을 때부터 신창과 온양에는 전양산()ㆍ이만길()이 이끈 수십 명의 명화적(: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부잡집을 약탈한 도적들의 무리)이 부유한 민가를 습격하는 등 소요가 일어났다.

국가는 이런 동요를 수습해야 했지만,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듬해 그는 사채()를 독촉해 걷다가 발각되자 신창현에 문서를 보내 백성들을 잡아오게 한 것이다. 최익현이 두세 번에 걸쳐 부당함을 지적하자 유장환은 유감을 품고 인사고과에서 그를 중급으로 매겼다. 신창의 백성들이 만류했지만, 최익현은 그날로 사직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승 이항로는 “최익현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어린 자식을 키우려면 생계가 막막할 텐데도 거취를 선뜻 결정했으니 주자()의 글을 잘못 읽지는 않았다고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 무렵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점차 긴박해지고 있었다. 1866년(고종 3)에는 프랑스가 침범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8년에는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해에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1871년(고종 8)에는 미국이 개입한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서세(西)의 동점()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경복궁 중건을 비판하다 - <시폐사조소>

최익현의 삶은 상소의 삶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 방향과 내용의 타당성에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경복궁 중건을 비판한 <시폐사조소()>(고종 5. 1868),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가져온 <계유상소()>(고종 10. 1873),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한 <지부복궐척화의소()>(고종 13. 1876), 을미의병을 촉발시킨 <청토역 복의제소()>(고종 32. 1895), 을사늑약에 항거한 <청토오적소()>(1905) 등 그는 시대의 고비마다 강경한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첫 번째 중요한 상소는 35세(고종 5년. 1868) 때 올린 <시폐사조소>였다. 그동안 최익현은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낙향해 있다가 그해 8월에 탈상하고 10월 10일 서울로 왔다. 그날 그는 조보()를 보고 자신이 이미 9월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간의 임무를 즉시 수행했다. 그것이 <시폐사조소>다.

상소는 제목 그대로 ‘당시의 네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가 지목한 폐단은 ① 경복궁 중건 등 토목 역사를 정지하고 ② 세금을 걷는 정치를 그만두며 ③ 당백전()을 혁파하고 ④ 사대문세()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 이것은 고종이 즉위한 뒤 섭정으로 실권을 행사해온 흥선대원군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지적한 폐단의 핵심은 경복궁 중건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는 목적에서 대원군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주요 시책이었다. 대원군은 고종 2년(1865) 영건도감을 설치해 중건을 시작했지만, 재원과 자원(목재와 석재 등)의 부족을 비롯한 여러 난관에 부딪치자 원납전()과 당백전 같은 무리한 정책을 도입했고 이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 최익현은 그런 측면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10년의 집권 기간 중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대원군의 위세는 매우 컸다. 대원군의 영향 아래 있던 대간들은 경복궁 중건이나 당백전 등은 이미 지난 사안이며 발언의 내용이 방자하다는 이유로 최익현을 즉각 탄핵했다(실제로 경복궁 중건은 최익현이 상소한 그해에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최익현은 바로 사직했다. 이번에는 패배했지만, 5년 뒤의 결과는 달랐다.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다 - <계유상소>

두 번째 상소는 5년 뒤에 작성되었다. 그때 최익현은 40세(고종 10. 1873)였다. 올린 해의 간지를 따라 ‘계유상소’라고 불리는 이 상소는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와 <호조참판을 사직하면서 생각을 밝히는 상소()>의 두 상소로 이뤄져 있다. 이것 또한 대원군을 겨냥한 상소였지만, 그 파장은 훨씬 크고 구체적이었다. 10년 동안 집권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이뤄진 것이다.

우선 고종 10년 10월 16일에 올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근년 이래로 정치는 옛 법을 변화시켰고 사람은 주관이 없으며, 대신과 육경()은 건의하지 않으며 대간과 시종()은 일 좋아한다는 비방을 피하기만 합니다. 조정에서는 저속한 논의가 일어나 정의가 소멸되었으며, 아첨하는 사람은 뜻을 얻고 곧은 선비는 사라졌습니다. 가혹하게 세금을 걷기를 멈추지 않아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윤리가 무너져 사기()가 막혔습니다. 공정하게 일하는 사람을 괴이하다고 하고, 사정()으로 일하는 자를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융성한 때를 만나고 지조가 있는 사람은 죽게 되니, 하늘의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고 땅의 변고가 아래에서 일어나서 자연의 섭리가 모두 그 올바름을 잃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따르는 대신들은 이번에도 최익현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고종의 달라진 태도 때문이었다. 고종은 최익현을 처벌하기는커녕 더욱 높은 자리인 호조참판에 임명했다. 11월 3일 최익현은 더욱 강경한 내용을 담아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호조참판을 사직하면서 생각을 밝히는 상소>). 그 상소의 핵심은 고종 1~2년에 철폐한 만동묘()와 서원을 복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국사를 보건대 폐단이 없는 곳이 없으니,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한 것은 이루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중에 더욱 현저하고 큰 것을 든다면 화양동의 만동묘를 철거한 것은 군신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요, 서원을 혁파한 것은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최익현은 청 동전()의 사용을 금지하고 원납전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 목표는 대원군의 퇴진이었다. 상소의 말미에서 그는 “친친(: 매우 가까운 친척, 즉 부모)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지위를 높이고 녹봉을 많이 주되 [중용]과 [논어]의 교훈을 따라 국정에는 간여하지 말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대신들은 최익현의 엄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의 의사는 동부승지를 사직한 최익현을 호조참판으로 승진시킨 조처에서 이미 드러난 것이었다. 고종은 상소가 올라온 이틀 뒤인 11월 5일, 모든 국무를 직접 결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대원군만 사용하던 궐 안의 출입문도 폐쇄했다. 이로써 10년 동안 유지되던 대원군의 권력은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번에도 최익현은 상처를 입었다. 상소를 올린 직후 의금부에 구금되어(11월 8일) 12월에 제주도로 유배된 것이다. 유배는 1년 반 뒤인 고종 12년(1875) 3월에야 풀렸다. 그러나 그동안 청 동전의 사용이 금지되고 만동묘 복원이 이뤄짐으로써 대원군의 하야를 포함한 최익현의 핵심적 주장은 모두 관철되었다(고종 11년 1~2월). 이 상소로 그의 이름은 당시의 정치사에 굵은 글씨로 씌어졌다.

42세의 중년에 접어든 최익현은 유배가 풀려 돌아오면서 전라도 장성에 있던 기정진(, 1798~1879)을 찾아뵈었다. 77세의 기정진은 주리론을 집성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위정척사론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개항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기에 만났다.

개항에 반대하다 - <지부복궐척화의소>

1905년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 심의를 입고 털모자를 쓴 모습인데 심의()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털모자의 모관()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보여준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물 제1510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유배에서 놓여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최익현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유명한 <지부복궐척화희소()>다.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한다”는 상소의 제목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내용과 강도를 짐작케 한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는 이런 행동은 멀리 임진왜란 1년 전 조헌 (, 154~1592)의 고사를 재현한 것이었다. 그때 조헌은 일본 사신을 처형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때 죽지는 않았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넉 달 뒤 충청도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산화함으로써 자신의 발언을 실천에 옮겼다.

고종 13년(1876) 1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로 들어와 개항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최익현은 즉시 상소했다(1월 22일). 그는 조약의 체결에는 “대략 세어보아도 다섯 가지 폐단이 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조목조목 열거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지적한 세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힘은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다.
둘째, 통상조약을 맺으면 생산에 한계가 있는 우리의 농산물과 무한하게 생산할 수 있는 저들의 공산품을 교역하게 되니 우리 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셋째, 왜인은 서양 오랑캐와 하나가 되었으니 그들을 거쳐 서양 문화가 들어오면 인륜이 무너져 금수()가 될 것이다.
넷째, 저들이 우리 땅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면서 우리의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하면 막을 수 없다.
다섯째, 저들은 재물과 여색만 탐하는 금수이므로 화친해 어울릴 수 없다.

그는 “바라건대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려주시면 조정의 큰 은혜일 것이며, 지극히 애통하고 절박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는 문장으로 상소를 맺었다.

최익현은 다시 유배되었다(1월 25일). 이번에는 흑산도였다. 그는 3년 뒤인 고종 16년(1879) 2월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46세의 나이였다.

그가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배 중암 김평묵은 칠언율시 3수를 보내왔다. 그 세 번째 수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정자는 용문으로 옮겼어도 끝내 입 다물었고() / 주자는 무이산에 은둔해 홀로 읊조렸네().” 즉 앞으로는 현실에 관련된 발언을 자제하라는 충고였다.

후배의 거듭된 유배를 안타까워한 이 충고를 따랐기 때문인지 최익현은 이때부터 을미사변(1895)이 일어날 때까지 20년 가까이 공적인 발언을 제기하지 않았다. 널리 알 듯 그 기간은 임오군란(1882)ㆍ갑신정변(1884)ㆍ동학농민운동ㆍ청일전쟁(이상 1894) 등 국내외의 격동이 빚어낸 거대한 사건이 연속된 국면이었다. 연보에 따르면 그동안 최익현은 금강산을 유람하거나(1882년 4월) 성리학에 관련된 편지를 주고받거나 토론을 벌였으며(1888년 4월) 친지들의 이런저런 경조사에 관여했다.

다시 상소를 올리다 - <청토역 복의제소>

최익현은 긴 침묵을 깨고 고종 32년(1895) 6월 26일 다시 상소를 올렸다. 62세의 노령이었다. “역적을 토벌하고 의복제도를 복구하기를 주청하는 상소()”라는 제목대로 그것은 박영효ㆍ서광범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를 처단하고 그들이 좁은 소매에 검은 옷으로 변경한 의복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상소였다.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국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같은 해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에 내려진 것이다. 최익현은 포천에서 단발령에 반대해 궐기하려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때부터 1904년까지 고종은 호조판서ㆍ경기도 관찰사ㆍ의정부 찬정()ㆍ궁내부 특진관 등의 벼슬을 내리면서 출사를 권유했지만 최익현은 모두 사직했다. 나라의 실질적인 멸망과 함께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와 투쟁에 나섰다.

거병과 순국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위치한 최익현선생묘. 선생의 묘는 1907년 충남 논산군 국도변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1910년에 오지인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무덤 옆에는 이선근이 글을 짓고 김기승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했다. 11월 3일과 14일 최익현은 마지막 상소인 <청토오적소()>를 올렸다. 거기서 그는 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그 체결에 참여한 박제순ㆍ이완용ㆍ이근택ㆍ이지용ㆍ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거대한 폭력 앞에서 상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계를 절감한 최익현은 투쟁의 방식을 바꿨다. 73세의 최고령 의병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 2월 그는 가묘()에 하직 인사를 드린 뒤 호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제자이자 전 낙안군수 임병찬(, 1851~1916)과 함께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4백 명 정도의 최익현 의병은 정읍ㆍ순창ㆍ곡성 등을 돌며 시위했지만 병력과 무기 등 모든 측면에서의 열세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최익현은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7월 8일 쓰시마()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했고 결국 11월 17일에 순국했다. 한국 근대사의 격동을 모두 겪은 73년의 길고 파란 많은 생애였다. 그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끝으로 최익현을 주제로 삼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198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오태환의 <최익현>이다. ‘겨울 공화국’으로 불리던 어두운 시절, 시인은 한 세기 전 애국지사의 삶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부분 인용).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 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울음이 가려지겠느냐
파도 같은 분노가
그만 가려지겠느냐
어둡게 쓰러지며 울고 있다
희디흰 도포자락
맑게 날리며
성긴 눈발, 뿌리고 있다
눈감고 부르는
사랑이 무심한 시대에
하염없이 하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