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자살과 독일의 항복,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와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모습은 보통 우리 머릿속에 위와 같이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공정여행 참가자들은 또다른 종전의 모습을 앉고 있는 키앙간의 역사를 걷는 시간을 가졌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동남아에서 위세를 떨칠 때, 그 세는 대단했다. 말레야의 호랑이라 불렸던 일본군 동남아 사령관 '야마시타'는 그 때 즈음 그 유명한 미군의 '맥아더'를 필리핀에서 줄행랑을 치게 만들었고, 3년가량 필리핀을 강점한다. 이 때 무조건 항복을 한 군인 및 민간인들은 바타안 지방에서 120여 ㎞의 죽음의 행군을 시작하는데, 걸으면서 죽은 사람이 1만 여명,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이 기정사실화 되던 즈음 맥아더는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 때 미군의 공습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15만 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둘이 필리핀을 활개치고 다니기 전, 4백 여 년간 필리핀을 지배한 스페인, 그들의 무적함대는 필리핀 사람들의 피와 국토의 유린으로 가능했다.
키앙간은 맥아더가 야마시타를 잡은 곳이다. 그래서 또다른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지 중 하나이다. 마지막에 수많은 지뢰를 심어 놓고, 이푸가오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일본군, 그 때 미군과 이푸가오족은 형식적으로 동맹군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었어요. 미군과 동맹관계로서 우리 한테 몹쓸 짓을 한 일본군을 다 잡았고, 야마시타를 처형했던거지"
이때 맥아더는 동경재판의 결과를 지켜보지 않은 채 야마시타를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행동은 모든 비난의 화살을 야마시타와 일본군에 쏠리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남기고, 이후 필리핀 근현대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히며 전략적 군사기지로 전락했던 역사를 걸어보면 미군과 이푸가오족의 '동맹' 관계는 착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시트모의 에코 투어 가이드들은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이 공화국이 된 이후, 일본 사람들이 제법 키앙간으로 관광을 왔습니다. 처음에는 조상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배우러 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야마시타가 동남아에서 약탈한 수많은 금은보화가 이 곳에 묻혀 있단 소식을 듣고 찾아오 이들이었죠. 밤에는 땅을 파고 있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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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이푸가오 사람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키앙간의 중심부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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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이푸가오 사람들은 그들을 강점했던 세 나라 스페인, 미국, 일본 중 강점기간이 3년 여에 불과했던 일본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가장 안 좋은 편이다. 미국에 대해선 어떨까?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강점했단 생각이 들진 않아요. 오히려 그들 덕에 잘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죠. 심한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과 나라간 통합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하지만 적어도 이푸가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그들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고 움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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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게릴라 전을 펼치면서 저항하던 곳에서, 시트모(SITMo : Save the Ifugao Riceterraces Movement)의 에코투어 가이드 '조나단'이 그 때 상황을 공정여행 참가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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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슬픈 식민지 역사는 이푸가오를 비롯한 필리핀 곳곳에 남아 있다. 수많은 부족들이 저마다 살아가던 필리핀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스페인 사람들의 총과 칼로 시작된 강점역사,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500 여 년의 세월. 그 후 해방을 맞았지만 식민강점 시기 형성된 토호들은 지금까지도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고 총선거를 얼마 앞두지 않은 필리핀에서 (선거)결과의 영향을 줄만한 수많은 살인을 방조하는 구조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도 일본한테 강점 당했었지?"
"그렇지. 그랬지"
"너희는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뭔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땅히 정리되는 말이 없었다. 다만 이 슬픈 식민지 역사를 걸으며 우리는 꼭 기억해야만할 역사적 교훈을 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