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할만한 것들

역사만큼 깊은 종가 사연

히메스타 2010. 11. 24. 14:46
왕이 내린 칼·손 때 묻은 벼루·애틋함 담긴 옥피리…
경북지역 12개 종가 '보물여행'

가문의 뿌리를 지켜내고 있는 종가(宗家). 종가를 품은 종택에는 저마다 그 역사만큼이나 깊은 사연이 담긴 보물이 있게 마련이다. 조상의 손길이 닿아있는 벼루,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는 옥피리, 신비한 빛을 내뿜는 옥병, 왕이 하사한 칼…. 하지만 종가가 수백년 세월을 견뎌내며 지켜온 최고의 보물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마음, 사람을 아끼는 뜻이었다. 지난 16일 경상북도는 경북여성정책개발원과 함께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2010년 종가포럼'을 개최했다. 경북을 대표하는 12개 종가의 건축, 음식 등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이날 백명진 서울대 미대 교수 연구팀은 경북도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12개 가문의 문장과 인장을 공개했다.

문장을 만들기 위해 백 교수 연구팀은 지난 3~5월 3개월에 걸쳐 경북지역의 여러 종택을 직접 찾았다. 인장의 문양을 구상하려고 각각 종가를 대표하는 보물도 하나하나 물어 살펴봤다. 백 교수 연구팀의 발길을 따라 종가의 보물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가문 유지비결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 =보통 종가 하면 명망 있는 가문과 유산을 떠올린다. 아니면 고택과 누렇게 바랜 한서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곳곳에 자리한 종가는 살아있는 역사 그대로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혈통의 힘이 종택 안에 숨쉬고 있었다. 수십 세대를 이어오면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종가는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가문이 존경받으며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나 권력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지금은 우리 현실에서 찾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ㆍ높은 사회 신분에 맞는 책임과 의무)'가 500년 넘게 종가를 살아있게 한 원동력이다.

아예 '권력을 좇지 말고 숨어 살 것'을 가훈으로 내세운 종가도 여럿이다. 영양 한양 조씨 호은(壺隱) 종택은 호은이란 이름 자체에 '숨어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영주 인동 장씨 연복군 종택을 있게 한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도 세웠다. 이때 왕으로부터 받은 패도와 옥피리가 가문의 대표적 유물로 전해진다. 문무에 능해 많은 공을 세운 장말손이지만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은 '벼슬도 말고, 나서지도 말고, 부자도 되지 말고 은둔하는 법을 찾으라'였다.

나라를 위하는 뜻은 컸지만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속된 마음은 수백년 종가의 역사에서 찾아 보기 힘들었다. 종가가 짧게는 300년, 길게는 600년도 넘게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돈과 권력으로는 명망 있는 가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자연을 벗 삼아 조용히 살면서도 선비의 지조를 이어갔고, 인근에 살고 있는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택의 역사는 여기에 뿌리를 둔다.

영덕의 영양 남씨 난고 종택을 세운 난고 남경훈은 조선 중기 학자이면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임진왜란 때 경주성과 영천성 탈환에 기여했다. 남경훈은 의병으로 공로를 세우고도 벼슬 할 뜻을 접고 난고 종택을 지었다. 고령에 선산 김씨 점필재 종택을 건립한 김종직은 조선시대 사림파의 거두 중 한 명이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와 있을 때 백성이 공물로 차를 바치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관이 운용하는 차밭을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돈과 권력으로 명가 오른 가문없어 =문경의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가는 1900년대 초반 사재를 털어 도천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에게 신문물을 가르쳤다. 도천학교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모의한 황옥 선생 등 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종가라고 하면 장자 우선주의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종택의 보물 중에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는 물건도 있다. 예천 용문면에 위치한 예천 권씨 종가는 세조 때 연복군 장말손이 왕으로부터 받은 옥피리를 간직하고 있다. 연복군이 옥피리를 맏딸에게 대대로 물려주라고 해서 예천 권씨 가문에 흘러 들어왔다. 예천 권씨 가문에 전해질 때 마침 딸이 없어 이 가문 보물로 자리 잡았다.

고목·독락당…자연 사랑 고스란히 =또 종가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이다. 여주 이씨 종가를 대표하는 경주 안강읍의 독락당(獨樂堂). 독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홀로 즐긴다'는 말이지만 숨은 뜻은 다르다. 사마광의 '독락원기'를 보면 맹자가 '사람은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에 대해 사마광은 '자연이 있어 혼자가 아니며 자연과 더불어 즐긴다'는 문구가 나온다. 독락당의 이름은 여기에서 나왔다.

독락당 담장을 휘감아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관어대(觀魚臺)가 나온다. 관어대에 앉으면 나무길을 따라 저 멀리 흐르는 맑은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름 그대로 물고기 노는 것을 바라보는 곳이다. 조선 중종 때 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틀을 만든 이언적이 머물던 건물이기도 하다. 여주 이씨 종가를 상징하는 보물인 독락당은 우리 조상이 자연과 함께 하는 마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안동 권씨 충재 종택을 상징하는 봉화 봉화읍의 청암정(靑巖亭)에도 같은 뜻이 담겨있다. 청암은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를 의미한다. 변하지 않는 지조를 자연에 빗댔다. 청암정은 개울로 둘러싸여 있다. 좁은 바위다리를 건너야만 청암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바위다리는 신선계로 들어가는 길을 상징한다.

청송 부동면의 달성 서씨 석간(石澗) 종택도 자연과 맞닿아 있다. 석간이란 이름은 돌 석자와 물 간자로 이뤄져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를 담았다.

종가의 자연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느 종가든 아끼는 보물 목록에 고목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자연 그 자체가 종가를 상징한다. 진성 이씨의 안동 와룡면 주촌 종택 앞마당에 들어서면 기이한 나무가 눈길을 끈다. 위로 높이 자라지 않고 옆으로 가지를 벌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6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뚝향나무다. 천연기념물 제314호로도 지정돼 있다. 진성 이씨 종가의 최고 보물이다.

영덕 영해면 난고 종택에 자리한 약 370년 된 백일홍나무는 영양 남씨 가문을 상징하는 기념물 중 하나다. 문경 산북면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의 400년 수령 탱자나무도 종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넓게 뻗어 있는 탱자나무 가지는 가문의 역사를 드러내듯 고고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 보물 자랑요? 도둑 무서워서 꼭꼭 숨기죠 >

"옛날 우리 집에 이런 보물이 있다, 유품이 있다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랑이 화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던 영정도, 현판도 도난당했습니다. 도난당하기 직전에 구해낸 것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대형금고를 산소절단기로 뜯어가는 도둑도 있더군요. 땅 속에 있는 것도 파 내가는 세상에 땅 위에 있는 것이 남아나겠습니까. 보물을 잃어버린 심정,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경북 문경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의 종손 황규욱 씨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주소를 표기하지 말고 사진도 가급적이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모조품 찍은 것을 썼으면 한다고 했다. 괜히 알려졌다간 전문 도굴꾼의 표적이 될 뿐이란다. 황씨 종택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서예 대가 유한지(兪漢芝)의 글씨가 담긴 현판이 있었지만 도난당했다.





영양 남씨 난고종택 만취헌

예천의 예천 권씨 초간종택도 비슷한 화를 겪었다. 아름다운 장식이 새겨져 있는 감실을 도난당했다 겨우 찾았다. 감실은 신위를 보관하는 장이다. 종택에는 보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다. 도난당해 현상금까지 걸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 간신히 되찾았다. 그런 아픈 과거 때문에 예천 권씨 종택은 지금은 외부인 누구에게도 감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일을 당한 것은 황씨, 권씨 종택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종택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가문의 유물을 도난당한 아픔을 갖고 있다.

경북 종가 문장ㆍ인장 제작 작업을 지휘한 백명진 서울대 미대 교수는 "현장 조사에서 종손 대부분이 보물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 깜짝 놀랐다"면서 "갖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하지만 사기꾼, 도굴꾼에게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개인 소유이긴 하지만 국보이기도 하다"면서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해서 적극적인 보안지원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