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할만한 것들

오페라의 소프라노는 죽는다?

히메스타 2010. 8. 18. 09:06

"어두운 밤에 무지갯빛으로 날아가는 환상이며 모든 인류가 구하는 환영이다. 밤마다 다시 태어나지만, 아침이면 죽는다. 이것은 무엇인가?" 답은 희망(La esperenza). 이 같은 선문답식 퀴즈 세 가지를 모두 맞혔지만 투란도트가 결혼에 응하려 하지 않자, 칼라프는 마지막 카드를 던진다. 이번에는 칼라프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라면서 공주에게 하룻밤의 시간을 준 것이다.

칼라프가 누구인지 몰라 밤을 새우던 공주 앞에 눈먼 노인과 젊은 여인이 끌려온다. 칼라프의 아버지 타타르 왕 티무르와 하녀 류였다. 칼라프를 짝사랑하는 류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칼라프의 사랑을 위해 입을 열지 않고 자결해 비밀을 지킨다. 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투란도트의 마음이 흔들리고 칼라프는 공주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호소한다. 결국 공주의 차가운 마음이 녹아 공주가 눈물을 흘리자 왕자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마지막 순간 황제 앞에서 투란도트는 '그의 이름은 사랑(Amor)'라고 선언하고 칼라프와 뜨겁게 포옹하며 결혼에 응한다. 퀴즈의 답이 아닌 사랑의 화답을 한 셈이다.

코믹 오페라가 아닌 오페라에서는 대부분 소프라노가 죽는다. 소프라노를 맡은 저 여인은 언젠가 죽겠구나, 생각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들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거나, 사랑하는 이의 칼에 찔리거나, 자결을 한다. '투란도트'에는 공주와 하녀 두 명의 소프라노가 등장하는데 '투란도트'에서 죽는 것은 리릭 레제로 하녀 류다. 투란도트 역은 가장 무겁고 강한 소리를 내야 하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몫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류의 사랑에 감동해 공주와 왕자의 사랑이 완성되는 역설적 구도다.

2003년 상암경기장 '투란도트'는 대형세트지만 무대와 객석 사이가 워낙 멀었다. 때문에 관객들은 성냥갑처럼 보이는 무대를 그대로 볼 수 없어 양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공연을 관람해야만 했다. 음악소리와 함께 투란도트가 스크린에 클로즈업되자 4만명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와아' 하면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우람한 체격의 공주. 저 여인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말도 안되는 퀴즈쇼에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칼라프마저 예쁜 류를 버리고 우람 공주에게 목을 매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가수의 목소리 있는 그대로를 듣고 보는 오페라극장 관객들은 류와 투란도트의 시각적인 차이를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운동장 오페라는 달랐다. 모든 소리들이 마이크를 통해 확성됐기 때문에 류의 가볍고 가는 소리와 투란도트의 강하고 찌르는 듯한 소리의 차이를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영화감독 장이머우(장예모)가 연출을 맡고 베이징의 명소 자금성에서 1998년 초연될 때 야외 공연은 역사적인 의미가 컸다. 하지만 상암경기장에서의 야외 오페라 '투란도트'는 뜬금없는 선택이었다. 초대형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8월 12일부터 2010년 버전으로 새롭게 공연하기로 했던 로린 마젤 지휘의 상암경기장 '투란도트'가 1주일 전에 갑자기 취소됐다. 사유는 날씨와 예매 저조. 사실상 준비 부족을 드러낸 결과다. 소프라노가 죽기도 전에 오페라 공연 자체가 죽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