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는 100여 편의 미사곡와 300여 곡의 모테트를 작곡한 후기 르네상스 교회음악의 거장으로, 오를란도 디 라수스(라소)와 함께 16세기를 대표한다. 그는 아카펠라 형식을 창안해 폴리포니(다성악) 교회음악의 지표를 세운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팔레스트리나'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로마 근교의 지명에서 왔다.
팔레스트리나가 젊었던 시절에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렌토(트리엔트)에서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敎理)와 교회법을 논의하고 성서 해석을 심의하는 중요한 공의회가 열렸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가 위기의식 속에서 쇄신과 수구(守舊)를 놓고 부심했던 저 유명한 트렌토 공의회(1545-1563)다. 이 공의회 기간 동안 ‘교회음악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길고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고, 그 결론으로 도출된 교회음악의 발전 방향은 '명확한 가사 전달, 악기 사용 제한, 세속음악 선율 배제, 복잡한 음악 구조 지양' 등이었다. 간단히 표현하면, '음악으로 알아듣기 쉽게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의미였다. 당시 교황은 "폴리포니의 현란함이 신앙심을 흐트러지게 한다"는 이유를 들어, 교회음악이 폴리포니(다성악)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단선율, 단성악)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폴리포니는 모노포니와 비교하면 당연히 '복잡한 음악'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폴리포니 작품들이 사멸하는 것을 막으려고 교황의 명령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전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독일 작곡가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는 16세기의 이 사건에 주목해 대단히 독특하고 개성적인 독일어 오페라를 창작하면서, 대본도 스스로 썼다. 작품의 초연은 1917년 6월 12일, 뮌헨 프린츠레겐텐테아터에서 이루어졌고, 공연시간 3시간 30분에 달하는 긴 작품이다.
폴리포니를 살린 '음악의 구원자'
1막에서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악장 팔레스트리나(테너)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로 창작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 시름에 잠겨 산다. 그의 열일곱 살 제자 실라(메조소프라노. 바지역)는 팔레스트리나의 거실에서 피렌체 스타일의 새로운 멜로디를 노래하고 있다. 그때 로마의 보로메오 추기경(베이스)이 찾아와 '교황이 폴리포니를 금지했다'고 알려주며, 폴리포니를 구하기 위한 걸작을 당장 작곡해야 한다고 팔레스트리나를 재촉한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폴리포니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장엄하고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어 교황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무게에 지친 팔레스트리나는 이 청을 거절한다. 그러자 추기경은 팔레스트리나가 이단에 물든 게 아닌지 의심하며 떠나버린다. 인생에 회의를 느껴 죽음을 향하려 하는 팔레스트리나에게 과거의 대작곡가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음악이 사라지고 잊혀지지 않도록 어서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대작을 작곡하라고 촉구한다. 그때 천사들과 함께 죽은 아내 루크레치아가 나타나고, 팔레스트리나는 천사들이 불러주는 대로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를 작곡해놓고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2막에서 공의회에 모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독일 등지의 추기경, 주교들은 서로 다른 견해로 갑론을박을 벌인다. 그 밖에서는 소란과 싸움이 벌어지고 인명피해가 속출하는데, 팔레스트리나는 작곡한 미사곡을 발표하라는 교황의 명을 어긴 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그의 15세 아들 이기노(소프라노, 바지역)는 아버지의 악보를 추기경에게 넘겨주고 아버지를 석방시킨다.
3막.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합창단원들이 옥에서 풀려난 그를 찾아오고, 다들 초조하게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에 대한 공의회의 판정을 기다린다. 마침내 교황 앞의 초연은 대성공으로 끝나고, 교황과 보로메오 추기경은 팔레스트리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성 요한(이탈리아어로 '조반니')이 천사의 노래를 들었듯 또 하나의 조반니(팔레스트리나의 이름)의 음악에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고 추기경은 말한다. 이 결과, 팔레스트리나는 시스티나 성당의 종신 악장으로 임명되지만, 제자 실라는 그의 곁을 떠나 새로운 음악을 찾으러 간다.
팔레스트리나에 자신을 대입한 피츠너
작곡가 피츠너는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1894년부터 3년간 마인츠 극장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그 뒤 10년간 베를린에서 작곡을 강의한 다음, 뮌헨에서 지휘자로, 스트라스부르(현재는 프랑스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 영토여서 '슈트라스부르크'로 불림)에서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국수주의적 애국주의를 표방하며 "퇴폐적인 프랑스 음악에 대항해 순수하고 숭고한 독일 음악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공공연히 천명했다. 이런 이유로 피츠너는 1차 대전 후 이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1920년에는 베를린 예술대학 작곡과 교수로 초빙되었고, 1929년부터는 뮌헨 음악 아카데미에서 강의했다.
음악사에서 피츠너는 시대의 조류를 거스른 작가로 기록되며, 그의 작품은 숭배자들의 격찬을 받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 했다.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현대음악에 거부감을 느끼고 과거의 음악형식을 고수하려 했던 피츠너는 교회음악에서 폴리포니를 수호하려는 팔레스트리나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의 성공으로 피츠너는 순식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나란히 독일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불리게 되었고, 이 밖에도 [가련한 하인리히], [심장] 등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는 몹시 까다로운 완벽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1917년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서 [팔레스트리나]가 공연되었을 때의 에피소드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1막에서 보로메오 추기경이 거리로 나설 때 예복 망토를 걸치지 않고 팔에 건 채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피츠너는 관객의 열화 같은 성원에도 박수에 답하러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뒀는데도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내내 대단히 침울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에게 '16세기에 로마의 추기경이 예복 망토를 입지 않고 팔에 건 채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대체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느냐'며 기분을 풀지 않았고, 브루노 발터는 그 배역을 노래한 가수에게 '다음 공연 때는 반드시 망토를 걸치고 나가라'고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발터는 "나는 그의 [팔레스트리나]보다 더 도덕적으로 진지하고 감성적으로 현명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며 이 작품을 극찬했다.
역사적 사실을 참고해보면 팔레스트리나가 작곡한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는 실제로 트렌토 공의회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한다. 이 부분은 피츠너의 창작이다. 사실 피츠너는 팔레스트리나의 예술을 숭배했다기보다는 이 르네상스 시대 작곡가의 창조적인 고독과 천재성에 관심이 있었다. 피츠너의 이런 관심은 그가 심취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오로지 예술에 충실한 고독한 예술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1막, 그리고 세속적 이기심을 토대로 한 정략과 음모가 난무하는 2막 공의회 장면에 피츠너는 일부러 대조적인 음악을 사용했다.
마지막 3막에 가면 마침내 갈등은 해소되고 내면의 평화와 충족감이 오케스트라를 가득 채운다.
음악적 모더니즘을 거부했던 피츠너 자신의 의지는 '모더니스트들의 위험'을 강조하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 속에 녹아있다. 피츠너는 바그너적 모티프들을 종종 사용하고 있으며, 여러 부분에서 대위법적 효과를 사용했다. 특히 이 작품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뿐만 아니라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과 유사한 부분들이 들어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음악적 절정은 이미 1막 천사들이 출현하는 장면에 나타난다. 워낙 뛰어난 장면이어서, '여기서 오페라가 끝났어야 했다'는 비판을 낳을 정도였다. 그러나 2막에서 예술가와 세속 권력의 대결 장면은 그로테스크와 아이러니를 혼합한 생동감으로, 작곡가이자 대본가인 피츠너의 놀라운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피츠너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나치에 대한 동조는 이 걸작의 공연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피츠너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했다는 이유로 함부르크에서는 이 공연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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