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다 - 고종

히메스타 2018. 5. 1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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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후대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 사례는 심심찮게 있다. 태종이나 세조, 연산군과 광해군 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왕조가 거의 수명이 다해 갈 무렵에 왕이 된 고종(, 1852~1919) 또한 역사적 평가가 인색한 왕 가운데 하나다. 망국의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연 구국의 황제인가? 아니면 망국의 황제인가?

최근에 와서 대한제국을 세우며 큰 실권 없는 황제에 오르면서까지 왕조를 부흥시키려 했던 그의 노력들이 재평가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망국의 황제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고종이 살았던 시기는 우리 역사가 근대사회로 이행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대한제국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식민지화의 길을 걸었고 제국의 황제는 국권을 지켜내지 못한 인물로 남아야 했다. 긍정적인 평가이든 부정적인 평가이든, 그는 실로 조선왕조의 비극적인 말로를 온 몸을 겪어야 했던 황제였고, 부인인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흥선군의 둘째아들, 왕이 되다

1863년 12월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33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다음 왕으로 결정했다. 이에 철종이 승하한 지 5일만에 명복, 즉 고종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혈통으로만 따지면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힘든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복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외척인 안동김씨를 숙청하려는 대왕대비 조씨와 부랑배 노릇까지하며 기회를 엿보던 흥선군의 정치적 입장이 맞았기 때문이다. 명복은 익종(, 효명세자)의 후계이자 대왕대비 조씨(이하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개똥이었다. 소년기에 명복으로 개명했고 왕이 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으로 바꾸었다. 형인 이재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손쉽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12살의 고종이 정치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은 고종 즉위 후 1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상의 실권은 부친인 흥선 대원군(이하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대원군의 집권 시기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발발하는 등 서구 열강의 침입이 노골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대원군은 외교상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을 쓰며 통상압력을 물리쳤고 이와 아울러 서원을 대대적으로 없애 외척을 비롯한 양반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1866년에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훗날의 명성황후)을 자신의 며느리이자 고종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맞수가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친정을 선포하다

1872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성인이 되자, 부친을 대신하여 직접 정치를 주관하고자 했다. 이때는 대원군의 독주에 대한 관료들의 불안감과 위기감 또한 고조되던 시기였다. 노론 유림 세력은 대원군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비난을 해 왔으며,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감을 가진 개화세력 또한 성장하고 있었다. 친정을 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었다.

때마침 대원군의 집권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하며 부친인 대원군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결국 성인이 된 고종은 반대원군 세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의지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친정 선포 이후 고종은 대원군 중심의 정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고종은 조대비의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세력을 재편하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먼저, 영돈녕부사 홍순목과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을 파직하고 영의정에 이유원을 그리고 우의정에는 박규수를 새로 임명했다. 강로와 한계원은 각각 남인과 북인 계열로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대원군에 의해 정계에 진출한 대표적인 대원군 세력이었다. 이유원은 독자세력이 없어 고종의 친정세력을 통합할 인물로 적임자였다.

대원군 정권의 무력적 기반은 삼군부였다. 고종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삼군부를 약화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 무위소()를 설치하였다. 병권 장악을 위해 병조판서에 이재원과 같은 친위세력을 배치하였고, 훈련대장, 금위대장, 어영대장에 친정세력들을 앉혔다. 아울러 고종은 재정권 장악에도 주력하였으며,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고종이 친정 이후에 실시한 정책들은 재정과 군사, 외교 분야에 관련된 것으로 특히 대원군이 추구한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고종의 재정 개혁은 각종 세금에 대한 개선책이었다. 예를 들어 군비확충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대원군이 각 도성문에 매긴 유통세를 없앴다.

고종의 친정이 아무 탈없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춘생문 화재를 시작으로 궁궐 안팎에서 원인 모를 각종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1874년(고종 11)에는 중전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가 폭사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영남유생들이 대원군의 하야에 항의하는 등 정국이 불안정했다. 이에 고종은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을 대신으로 등용하여 대원군 집권의 명분을 반감시키는 한편, 김병국을 통해 여전히 성세를 보이고 있는 안동김씨 세력들과도 연합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다.

고종의 친정체제가 형성되었지만, 왕과 정부의 권위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물가상승으로 민심은 불안했고, 각 지방에는 화적떼가 들끓었다. 민심은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사실, 고종시대는 고종이 주인공이 아닌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한 대원군의 10년 집권(1864~1873)은 말 그대로 권불십년()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권력은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가 틀어쥐었다. 사실상 고종이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고는 하나, 부친인 대원군과 직접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긴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명성황후는 그의 바람막이 역할로 제격이었다. 고종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종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의지하고 사랑했지만,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866년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린 고종은 자신의 첫 사랑인 궁녀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을 얻었다. 명성황후 또한 그렇게 원하던 왕자를 얻었지만, 왕자는 항문이 막히는 장애가 있었다. 왕자는 결국 변을 보지 못하고 생후 5일 만에 사망했다. 왕자의 사망이 시아버지 대원군 때문이라는 오해를 낳으면서 명성황후의 대원군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1880년 13세 밖에 안 된 완화군이 급질로 사망하자 이번에는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의심하였고, 두 사람 간의 대립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으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궁궐을 피해 도망친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되었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나,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정치 간섭을 받았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것은 1895년(고종 32) 음력 8월 20일이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친로파 내각은 무너지고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파 내각이 들어섰다. 고종은 시신조차 불에 타 온전치 못한 왕비의 죽음을 감추고 있다가 2개월여가 지난 뒤에야 서거를 발표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미국대리공사 알렌 등의 협조로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 내의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지만, 경복궁에서 일본 친일 내각에 포위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종은 청일전쟁을 보며 청나라의 몰락을 확인했고,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러시아라 판단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냈던 고종이 다시 환궁한 것은 1년이 지난 1897년 2월 20일이다. 그 사이 환궁을 촉구하던 민심이 많이 안정되었고, 자주권 확립과 함께 황제국을 건설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환궁한 지 6개월이 지난 1897년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그해 10월 12일 서울 회현방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했다. 그간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었던 조선을 대신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성립과정에서 가장 큰 핵심은 고종의 칭제 문제였다. 일찍이 고려시대 묘청이 서경천도와 함께 칭제건원을 주장한 적이 있으나, 조선왕조에서 칭제건원 주장은 없었다. 알려진 바로는 1884년 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이 처음 주장했다고 한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늦춰가면서 대한제국의 출현을 준비했다. 고종이 황후의 장례를 연기한 것은 자신이 황제자리에 오른 뒤 죽은 왕비를 황후의 예로 치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고유제를 올린 후 천명을 받아 황제에 등극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출현은 황제로서 고종의 군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중국과의 사대 질서가 일탈한 것이면서 동시에 독립의 의미를 지녔다. 독립신문의 발간이나 독립협회의 창립, 독립관 건립 등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국권에 대한 인식이 뚜렷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대한제국은 국민주권에 기초한 입헌정치 아래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탄생은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추락한 군주의 지위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조선왕조의 연속선상에서 세습의 역사성을 정당화하고 절대군주체제로 전개할 것임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헤이그특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 1896년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등 일련의 사태는 국가의 자주성과 국왕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상 1897년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의 성립은 그러한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한편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균형이 빚어낸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에 종주권을 주장할 수 없었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했던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성립한 대한제국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은 대단히 허약할 수 밖에 없었다. 열강의 식민지쟁탈전이 치열했던 시기에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초대황제로 등극하면서 추진한 일은 강력한 황제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만국공법’을 제정하고, 도시정비사업 및 철도사업 등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는 여러 사업들을 진행했다. 강력한 전제군주권의 확립과 부국강병이 곧 그가 추진한 광무개혁의 목표였다. 그러나 야심에 찬 일련의 그의 개혁사업은 일본의 침략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이 러일전쟁으로 깨지게 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열강들로부터 보장받았고,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 아래 이뤄지자 고종은 "보호조약은 무기로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므로 완전히 무효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반응이 없었다. 이어 고종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마침내 고종은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최후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 식민지 쟁탈전에 따른 분규를 해결하는 국제법회의로 40여 개 국이 참석하는 대규모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전 의정부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명을 평화회의에 급파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열강의 협조를 얻어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들 특사들의 노력으로 서방 언론에 일본의 만행이 소개되었으나, 각국 대표들은 이들의 호소를 냉정하게 외면했다. 결국 본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그 곳에서 순국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과 종신형을 언도받고 귀국하지 못했다.

헤이그특사사건(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의 퇴위를 종용했다. 1907년 정미7조약(3차 한일조약)과 함께 군대가 해산되었고, 7월 20일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개화의 군주인가, 망국의 군주인가

고종은 1919년 1월 21 오전에 덕수궁 함녕전 서온돌에서 68세를 일기로 갑자기 사망했다. 뇌일혈 혹은 심장마비였다고 하지만, 아침에 마신 음료에 들어있던 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시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의문의 죽음은 뒤이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의 장례는 일본 궁내청에서 국장으로 결정하였으나, 대행태왕의 장례로 격하되었다. 고종의 장례는 정상적으로 치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장례는 조선의 전통 장례가 아닌 일본 황족의 장례였고 행렬에만 조선 관례대로 하는 왜곡된 장례였다.

격동의 시대에 평화적 근대국가 건설을 꿈꿨던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 하지만 그는 많은 이들에게꿈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개명군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