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은 삶이 있다면, 그 주인공은 바로 나혜석(羅蕙錫, 1896~1949)이 아닐까 싶다. 20세기 초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녀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삶은 예술 자체였다. 그러나 그녀의 해방론에 가까운 여성관은 전통적인 여성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그녀의 대범한 도전은 불행의 신호탄이었다. 근대 신여성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녀의 화려했던 삶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조선 최고의 여류화가이자 엘리트 여성 나혜석이 행려병자로 비참하게 죽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삶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선택받은 천재 화가
서양화가이자 문학가로서 근대 신여성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현재 주소)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정월(晶月)이다. 부친은 용인 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이며 모친은 최시의(崔是議)이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천재적인 예술가적 자질과 외모를 겸비한 나혜석은 1913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둘째 오빠 나경석(羅景錫)이다. 나경석의 권유로 17세에 동경 유학길에 올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부유하고 개명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 여성으로서 한국 최초 여류서양화가의 삶을 시작한 나혜석의 인생은 곧 조선 미술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일등 인생이었다. 진명여고 수석졸업을 시작으로 한국여성 최초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서양화 전공, 최초의 여류화가 개인전 등 성공신화를 써나가기에 바빴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으로 살기에는 시대가 그녀를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 똑똑하고 자의식 강한 나혜석이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불꽃 같은 예술가적 혼을 가진 그녀의 영혼은 너무나 자유분방했고, 전통적인 결혼생활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그녀의 인생에서 첫사랑은 동경유학 시절에 만난 최승구였다. 시인이었던 최승구는 동경유학생 중 천재로 불리며 <학지광> 편집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최승구를 나혜석에게 소개한 인물은 오빠 나경석이었는데, 최승구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다. 집안에서 맺어준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와 나혜석은 유학지인 동경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나혜석은 절망하며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었다.
남다른 결혼과 세계일주여행, 그리고 이혼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후학 양성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과년한 여식을 결혼시키려는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지켜본 그녀는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고자 했다.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외교관이었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이미 결혼 전력이 있는 그와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년 연상으로 한 번 결혼했다가 상처한 상태였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19년 여름 변호사 자격을 갖고 서울에서 3·1운동 관련자들을 변호하기도 했고, 나혜석이 3·1일 운동 때 투옥되자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달려왔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였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개성을 이해하는 훌륭한 외조자로서 이 결혼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조건으로 김우영에게 4가지의 약속을 받아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김우영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요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김우영은 그녀의 희망대로 신혼여행길에 병사한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파격적인 결혼생활은 두고두고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실이 되었다. 공격의 선두는 남성들이었다. 인습에 젖은 그들은 그림을 위해 집을 비우는 나혜석을 비난했고,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아끼고 감싸는 김우영은 남자답지 못한 졸장부로 여겼다. 그런 세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외교관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자식을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세계여행길에 나섰다. 자식까지 두고 세계 일주를 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녀는 어떻게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지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나의 그림은 어떤가” 하는 철학적·예술가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계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유럽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서구의 여성운동과 지위 등을 견문할 기회가 되었다.
답답한 조선사회와 달리 서구사회는 그녀에게 유토피아였고 해방구였다. 그러나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파리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3·1운동 때 함께 투옥된 경험이 있고 취미가 다양하며, 그림에도 조예가 있는 최린은 한순간에 나혜석을 사로잡았다. 법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김우영은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다. 남편이 떠난 뒤 시작된 두 사람의 깊은 교제는 재불 조선사회를 시작으로 조선까지 널리 소문이 퍼졌다.
귀국한 뒤 나혜석은 생계가 곤란해지자 최린에게 도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내 평생을 당신에게 맡기오’라는 편지 내용은 아는 지인을 통해 와전되어 남편인 김우영의 격노를 샀다. 이때는 이미 최린의 관계를 한번 용서한 뒤였다. 두 번의 용서는 없었다.
김우영은 이혼을 청구하면서 만일 승낙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발한다고 했다. 나혜석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댁 식구들 또한 이혼을 종용했다. 나혜석은 이혼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하는 수 없이 추후 2년간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 재결합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다. 그러나 김우영은 곧 다른 여성과 결혼하였다. 재결합을 희망한 나혜석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재혼한 김우영 또한 배신감과 함께 가정을 지키지 못한 못난 남자라는 낙인으로 고통을 받으며 그의 인생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인형의 집] 노라가 된 나혜석. 젊은 날 노라 부인을 열망했던 그녀였지만, 현실은 자식을 두고 빈몸으로 쫓겨난 이혼녀였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는 김우영에게 재결합을 강하게 요구했다. 애끓는 모성애였다. 그러나 김우영은 자녀들과의 만남조차 거부했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남편과 최린으로부터의 버림.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활발하게 그림 활동을 하며 동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이기주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현모양처를 최고로 치는 그 당시에 그녀의 고백은 이른바 ‘백만 안티’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20세기 초 한국사회에서 이혼이라는 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혼이 금기시되었지만, 1932년 나혜석이 이혼했을 때 그 금기의 벽은 이미 깨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혼한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비난 또한 강한 시대였다. 그렇다고 해도 나혜석의 정신세계가 이혼의 상처로 행려병자가 될 만큼 연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세상에 자신의 치부를 용감하게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혼이 유능한 화가로서 문필가로서의 입지를 흔든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나혜석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좌절한 끝에 행로병자로 사망한 것은 [이혼고백서]의 공개와 불륜상대인 최린과의 위자료 소송에 있었다.
"나는 좀 더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함에는 경제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고 근면도 필요하였습니다. 불민한 점이 불소하였으나 동기는 사람답게 잘 살자는 건방진 이상이 뿌리가 빠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1934년, 8-9월호 <삼천리>에 실린 [이혼고백서] 중에서
나혜석의 [이혼고백서]는 1934년 잡지 <삼천리>에 게재되었다.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를 적나라하게 쓰고 남성중심의 조선사회를 고발하는 수기였다. 부부 사이의 치부마저도 드러낸 것이다. 이 글에서 그녀는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그런 관념은 상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해체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그녀는 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나혜석은 가정뿐만 아니라 연애와 섹슈얼리티에서도 남녀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이중성에 항의를 했다. 불륜을 저질러도 남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는데, 온갖 비판이 여성에게만 집중되는 불합리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그러한 생각은 남편 김우영이나 연인 최린과의 관계, 이혼에 이르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남편과 세상을 향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나혜석은 최린을 고소하였다. 고소내용은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였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자 최린은 나혜석의 생활비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혜석은 이혼당하여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받아 신경쇠약증까지 걸려 있는 상태였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위자료 1만 2천 원을 배상하라고 청구했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자신과 달리 최린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합리했던 것이다.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한 남편이나 최린 모두 실질적인 섹슈얼리티의 문제에서는 여느 남성과 차이가 없었다.
“나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을 뿐이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다.” 이러한나혜석의 고백은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자유로운 연애관은 프랑스 남녀연애관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자유연애였다.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은 엘리트 여성 나혜석.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의식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종래 금기시됐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불평등까지 포함하여 그간 수백 년간 지켜졌던 정조관념을 깨부수고자 했다. 그녀의 이러한 여성해방론은 진정 진보적인 것이었을까. 그녀는 죽기 전까지 보고 싶은 자녀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여성으로서는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천륜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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