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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스카문화 발전에 기여한 고구려 승려 - 담징

히메스타 2018. 4. 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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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반 일본의 쇼토쿠 태자아스카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에 쇼토쿠 태자는 발전된 문화를 가진 한반도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초빙, 영입하여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다. 이 아스카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나라는 주로 백제였지만 종종 고구려에서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그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아스카문화를 대표하는 절, 호류사[]의 금당에 1949년까지 있었던 벽화를 그린 사람으로 전해지는 고구려 승려 담징(579~631)도 있었다.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호류사의 금당벽화의 모사도. <출처 : 한국사기초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담징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가 서른을 넘기고 일본으로 건너간 610년은 고구려의 영양왕 21년인 때로 그는 법정이라는 승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 같다. 담징에 대해 기록한 [일본서기]에 따르면 5경과 채화에 능했고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일본에 전파하였으며 이외 벼루와 연자방아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담징은 오늘날까지 일본에 먹과 종이제조법을 가르쳐준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기록에 나타나듯 담징이 5경([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에 능했다 함은 유교에 달통해서 이를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다는 뜻이고 채화를 잘한 것은 그림을 잘 그렸다는 뜻이다. 종이와 먹의 제조법이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생각할 때 담징은 승려일 뿐만 아니라 학자이자 화가였던 것 같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학자, 화가로서 그 명성이 높았고 서른 전에 중국과 서역으로 유학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그가 일본에 국가 차원에서 초빙된 것도 고구려에서 이미 쌓아올린 명성의 덕이었던 것도 같다.

일본에 건너간 담징은 당시 주도적으로 일본의 아스카 문화를 성장시키고 있던 쇼토쿠 태자의 초대를 받게 되고 잠시 그의 집에 머물다가 인근의 절, 호류사에서 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호류사에서 담징은 수도와 정진을 하는 한편, 5경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1949년 보수 도중 화재로 소실된 금당의 벽화를 담징이 이때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오늘날에는 그 진위 여부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본 아스카 문화의 담징

7세기 전반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꽃피운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는 당시 정치의 중심이 나라 분지 남쪽 아스카[]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아스카 문화를 일으킨 사람은 스이코 천황의 조카이던 쇼토쿠 태자라고 알려져 있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섭정 자리에 있었다. 쇼토쿠 태자는 한반도로부터 제도와 문물 등을 수입하여 일본 국내의 체제를 정립 혁신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확립하였으며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천황이라는 칭호도 이때부터 썼다고 한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불교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 시기 꽃 핀 아스카 문화는 백제 문명의 연장이라고 할 만큼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물을 수입하여 이를 일본에 정착시켰다. 건축과 조각, 회화 등이 한국에서 건너간 승려, 학자들의 영향으로 발전하였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도 이 시기에 한국학자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앞서 6세기경에 백제에서 건너간 아직기왕인 등이 일본에 초기 유교를 전했다면 7세기 들어서면서 좀 더 차원 높은 유교 학문에 대한 욕구에 맞추어 지식인 학자와 승려들이 대거 일본으로 초빙되어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일본에 초빙되어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데 기여한 사람 중에 담징도 있었다.

담징은 초기 일본에 전해진 유교를 한 차원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5경에 달통한 학자로서 일본의 학문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더불어 자신의 회화 재능으로 일본 미술사의 발전을 앞당겼던 것 같다. 그가 전해준 종이와 먹 제조법이 일본의 학문과 회화사에 일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그는 호류사의 금당에 벽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 정토도인 이 금당벽화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유명했으나, 1949년에 불타 버리고 말았다. 현재 호류사 금당에 있는 그림은 불타버린 그림을 복원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금당벽화가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이 그림이 담징이 그렸다고 말해졌지만, 이후로는 그 회화 풍이나 제작방법, 호류사의 역사 등을 들어 담징의 그림이 아니라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

호류사 금당 벽화는 누가 그렸을까?

일본의 학계는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아잔타석굴벽화, 서역과 둔황, 원강석굴, 고구려 등을 거친 회화의 정수로 평가하면서도 그 화가는 불명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금당벽화 제작 시기와 담징의 생몰일이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는 탓이다. 호류사는 쇼토쿠 태자 당시 지어졌다고는 하나 670년 큰 불에 탔으며 현전하는 건물들은 이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631년에 죽은 담징은 이 새로운 건물에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의견이 분분한데, 1905년 일본 학자에 의해 호류사가 조사되면서 재건립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가, 최근에 호류사 인근에 그보다 앞선 시기에 지어진 절의 건물터가 발견되면서 그 건물터가 원래 호류사이고 지금 것은 670년 이후 새로 지어진 것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또 하나는 그림의 제작 기법과 화풍이 요철법과 채색법에서 서역 화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고구려 고분의 벽화 제작 기법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이를 두고 단순히 서역의 화풍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989년 호류사의 오중탑에서 금당벽화의 화가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관음보살상의 그림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일본 학계는 이 또한 담징의 작품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물론 호류사의 건립과 금당벽화 등에서 한반도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금당벽화의 작가가 담징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 1980년대 이후 일본 학계의 중론이 되었다.

호류사의 금당과 오중탑. <출처 : (CC) 663highland at Wikipedia.org>

그렇다면 호류사의 금당벽화는 누가 그린 것일까?

일본학계는 이 벽화가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서역 화풍에 토대를 둔 당나라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하쿠호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금당벽화의 주제인 사불정토도는 당시 한반도 불교회화의 특징이었으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서역 화풍이 비슷하게 금당벽화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금당 벽화는 그 화가가 반드시 담징은 아닐지라도 한반도, 특히 고구려에서 건너간 화가 1인 혹은 여러 명의 화가에 의해 그려졌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