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은 고구려 첩자 도림에게 속아 국력을 낭비했다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함락당하고 영토도 잃고 그 자신의 목숨마저 빼앗긴 못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정말 무능한 임금이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임금
개로왕은 백제 20대 비유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경(慶)이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즉위한 후 14년까지 기록이 전부 빠져 있다. 이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송서]에 전한다. 457년 개로왕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신하 11명에게 관직을 줄 것을 요청했다. 11명의 신하는 우현왕 여기(餘紀), 좌현왕 여곤(餘昆)을 비롯해 여훈(餘暈), 여도(餘都), 여예(餘乂), 목금(沐衿), 여작(餘爵), 여류(餘流), 미귀(縻貴), 우서(于西), 여루(餘婁)였다. 이들 가운데 8명이 모두 왕족인 여씨다. 특히 좌현왕 여곤, 보국장군 여도는 모두 왕의 아우인 곤지와 문주([삼국사기]는 아들로, [일본서기]는 동생이라고 함)를 가리킨다. 좌현왕은 흉노나 돌궐에서는 왕의 후계자인 동시에 병권을 장악하며 동쪽 영토를 관할하는 역할을 한다. 문주는 벼슬이 상좌평에 이르기도 했다.
백제에는 진(眞)씨, 해(解)씨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오랫동안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1명의 주요 백제의 신하들 명단에 진씨, 해씨가 빠지고, 왕족이 대거 들어 있다는 것은 개로왕이 즉위할 때에, 왕실을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크게 재편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제에서 왕후를 대후(大后)라고 불렀다. 이것은 개로왕이 대왕으로 불릴 만큼 권위가 올라갔음을 알려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군사를 모아 469년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했다.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 백제는 60년 가까이 고구려에 눌려 지냈다. 백제는 고구려의 업신여김과 핍박을 받고 있었다. 개로왕은 백제 중흥을 위해서 고구려와 관계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 공격은 이러한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개로왕은 북쪽 변경에 위치한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세우는 등, 고구려와 압력에 대항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 북위에게 백제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다. 고구려가 북위에게 해를 끼치는 정책을 펼치고 있고, 고구려에서 내부 혼란도 있으니, 이때가 쳐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북위는 고구려와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러자 개로왕은 북위와 사신 왕래를 끊어 버렸다. 그의 팽창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구려 첩자에게 속은 개로왕
개로왕이 북위에게 사신을 보낸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북위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냄에 따라, 고구려에서 백제가 북위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꾸민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할 기회를 노리면서, 먼저 도림 스님을 첩자로 파견했다. 도림은 자신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왔다고 속이고 백제로 몰래 들어왔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궁궐에 나아가 고하였다.
“저는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잘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왕님께 바둑의 참 재미를 알려 드리고자 원합니다.”
개로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사람을 시켜 도림을 불러왔다. 개로왕은 좋은 바둑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도림과 수시로 바둑을 함께 두었다. 개로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도림은 개로왕에게 넌지시 말했다.
“대왕이 다스리시는 백제는 사방이 산과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변의 나라들이 쉽게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대왕이 잘 다스리시는 것에 감탄하여 주변의 나라들은 백제를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위세와 부유함을 드러내어 다른 국가의 존경을 받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제의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아니하고, 선왕들의 시신은 볼품없는 무덤(假葬)에 묻혀 있습니다. 또 백성들의 집들은 강물이 범람할 때 자주 침수되고 있으니, 이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사람들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蒸) 성벽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을 비롯한 많은 화려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또 큰 돌을 캐내어서 아버지 비유왕의 무덤을 다시 크게 만들었다. 또 한강 변에 둑을 크게 쌓아 홍수를 막도록 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벌리다 보니, 백제의 창고는 비어갔다. 백성을 위해 둑을 쌓은 것이 오히려 백성들에게 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장에 끌려가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다. 백성들은 굶주리게 되었고, 군사들의 무기와 군량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다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은 점점 개로왕을 싫어하게 되었다.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를 만큼 백제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림은 백제를 위태롭게 한 후,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다. 그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백제를 공격할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고구려는 즉시 3만 군대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다. 고구려의 공격 소식에 개로왕은 크게 놀랐다. 그는 문주를 불렀다.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를 망쳐놓았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군사들도 약하니, 지금 고구려 군대를 막기가 어렵다. 나는 마땅히 적과 싸우다가 죽어야겠지만, 너는 우선 난리를 피하였다가, 다시 백제를 일으켜 주길 바란다.”
문주는 몇몇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개로왕은 수도를 함락시킨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아단성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문주가 신라로 가서 구원병 1만을 데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백제는 이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나라를 망치면 모두 폭군인가?
백제 31대 임금 가운데 후대에 큰 비난을 받은 분은 망국의 군주로 삼천궁녀 설화까지 탄생시킨 방탕한 임금인 의자왕과 개로왕이 있다. 의자왕은 태자 시절 해동증자라고 불렸으며, 642년 왕위에 오른 후 신라를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둔 공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나라를 망친 것은 간신과 요녀(妖女)의 꼬임에 빠진 탓이라는 변명거리라도 있다. 반면 개로왕은 변명거리도 없었다.
[삼국사기] ‘도미(都彌) 열전’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이 신하인 도미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강제로 범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기지를 발휘해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왕은 신하인 도미에게 죄를 씌우고 두 눈동자를 빼는 벌을 주는 등 전형적인 폭군(暴君)다운 행동을 한다. 도미의 아내는 눈이 먼 남편과 다시 만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쳐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개루왕은 백제 4대 임금(128〜196)이지만, 여러 상황으로 볼 때 21대 개로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도미와 도미 아내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리게 된 것은 704년 한산주도독을 지낸 김대문(金大問)이 쓴 [한산기(漢山記)]가 고려 시대까지 전해져 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유역에서 전해오는 도미 부부의 슬픈 이야기는 백제 사람들이 가졌던 개로왕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강력한 왕권의 그늘
강력한 왕권의 확립은 고대 국가에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대체로 정치적 발전이라고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의 뒷면에는 귀족들의 반발과 왕권의 독재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개로왕은 즉위 후 20년 가까이 아버지 비유왕의 무덤을 가매장된 상태로 방치해두고 있다가, 뒤늦게 거대한 무덤을 조성했다. 왕권 확립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귀족들의 반발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일부 귀족들은 고구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475년 고구려군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개로왕을 붙잡아 살해한 자인 걸루(桀婁)와 만년(萬年)은 백제에서 탈출한 이들이다. 이들은 개로왕에게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을 만큼 왕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귀족들이 반발하고, 민심도 왕을 떠났으므로, 고구려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개로왕은 이렇게 탄식하고 말았다.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기를 즐겨하겠는가?”
개로왕이 죽은 후 문주왕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왕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그러자 귀족들이 왕을 죽이기도 하는 등신권(臣權)이 강한시대가 도래했다. 반면 의자왕은 지나치게 왕권을 강화시켜 독재권력을 휘두르다가, 귀족들의 배신과 기강의 해이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백제 정치사의 비극이, 개로왕의 죽음을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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