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통상무역을 주장하며 북학의 씨를 뿌리다 - 박제가

히메스타 2016. 11. 21. 16:16

박제가 이미지 1

벽()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이루어져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뜻이다. 벽은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중략)…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1785년 박제가의 [백화보서()] 중에서

서자로 태어난 불우한 천재

군자는 불기(- 그릇처럼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여야 한다는 공자의 말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던 조선시대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전문가를 예찬한 초정() 박제가(, 1750~1805). 그는 시대를 앞서갔고, 그 때문에 고독한 지식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인물이다.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 11월 5일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의 생애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그가 서자 출신이라는 점이다. 박제가의 어머니는 정처()가 아니었고, 박평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조선시대에는 본부인이 낳은 적자와 첩이 낳은 서자 사이에 큰 차별이 있었다. 조선시대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에 서얼()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했을 정도였다. ‘서얼금고(- 서얼 출신은 관직에 나가는데 일정한 제한을 두었던 제도)’라는 가혹한 규정으로 조선시대 수많은 서얼 출신의 인재들은 자신의 재능을 사장시켜야 했다.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 서얼 차별은 유교의 영향도 있었지만, 과거시험에서 이른바 양반 적자()들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들인 서얼을 배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규제가 조금씩 완화되면서 서얼 출신 중에서도 문과급제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정조 재위 기간에 30명의 서자 출신 관료가 임용된 것은 그 이전 시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30명 안에 포함 되었던 박제가 또한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자 출신들이 관직에 올랐다고 해서 이들이 양반 적자들과 공평하게 승진할 기회를 가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서자 출신이라는 감출 수 없는 울분이 있었지만, 박제가가 학자로서 인정을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공이 컸다. 어려서부터 붓을 입에 물고 다닐 정도로 글쓰는 것을 좋아했던 박제가는 그의 나이 11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승정원에서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는 생계가 매우 곤란해졌다. 이리저리 이사다니며 가지고 있던 책들은 흩어졌고 어머니는 남의 집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웠다. 글짓는 것을 좋아했던 아들을 위해 박제가의 어머니는 아들이 다른 걱정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 어머니 또한 박제가가 24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이후 박제가가 학자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어머니 외에 장인인 이관상이 큰 영향을 주었다. 충무공의 5대손이었던 이관상은 박제가를 보자마자 맘에 들어 사위로 삼았다. 장인과 사위는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했고 서로 닮아 뜻이 잘 맞았다.

백탑시파의 결성과 북학의 꿈

박제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우한 서자 출신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767년 이후 박제가를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 문인이 주동이 되어 ‘백탑시파()’라는 문학동인 모임이 결성되었다. 백탑은 북학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서울 대사동(- 현재의 인사동 일대) 원각사 절터에 10층 석탑이 있었는데, 당시 이것을 ‘백탑’이라 불렀다.

백탑시파 문인들은 백탑 주변에 거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제가와 함께 백탑시파를 이끌었던 유득공·이덕무가 대사동에 살았고, 박제가는 남산 밑 청교동에 살았다. 1768년에는 연암() 박지원()이 백탑 부근으로 이사를 왔다. 백탑시파의 좌장격인 박지원의 집으로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백동수,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등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레 백탑시파가 결성된 것이다.

박제가가 박지원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십대 후반 무렵이었다. 박지원의 명성을 들은 박제가가 그의 집에 찾아가면서 이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제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박지원은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박제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의 인물됨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백탑 주변의 문인과 지식인들의 모임은 성황을 이루었다. 백탑시파 문인들은 서얼에 대한 차별 의식이 없었고 지적 능력을 우선시했다. 개방성과 개성을 존중했던 백탑시파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발휘하고 꽃을 피웠다. 백탑시파들의 인연은 10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1779년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면서 백탑시파들은 예전처럼 자주 만나기 힘들었다.

조선 최고의 시짓기 모임이었던 백탑시파 문인들의 시는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다. 백탑시파 문인이자 유득공의 숙부였던 유금은 1776년 중국사절단으로 중국에 가면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의 시 399편을 모은 [한객건연집()]이라는 책을 북경에서 펴냈다. 중국 최고의 지식인 이조원과 반정균이 이들의 시를 높이 평가했고, 이들 네 사람은 북경의 시단에서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문학동호회였던 백탑시파들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홍대용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홍대용의 중국여행기를 접하면서 서서히 중국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3대 연행록이라 일컫는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홍대용의 [담헌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문명에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백탑시파에 영향을 준 것이 홍대용의 연행록이었다.

네 번에 걸친 중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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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모습. 과천문화원 소장.

박제가와 나빙이 교류했던 북경 유리창의 관음사 거리. 박제가는 사행을 통해 중국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했고, 이것은 그의 제자 추사 김정희에게로 이어졌다.

박제가는 실학자 중에서 청나라를 가장 사랑한 인물이었다. 당대 사람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당벽()’이라 조롱했지만, 청나라 문인들은 그를 학자로서 시인으로서 평가할 뿐 출신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었다. 조선에서는 서자라고 차별 받았지만, 청나라는 그런 차별이 없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사람에게 중국은 선망의 나라였다. 조선은 명나라 사행(使)을 ‘조천()’이라 부를 정도로 명과는 사대외교를 했다. 그러나 청나라 사행의 경우는 '연행()'이라 부르며 사대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청나라 사행을 의미하는 연행은 북경의 옛 이름인 연경()의 지명의 딴 용어이다. 중국의 고전이나 문헌 자료를 많이 보았던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으나, 실제 외교사절이 아니면 중국에 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외교사절로 중국에 갔다고 해도 명대()에는 북경 숙소 외에자유롭게 관광하기가 힘들었다. 사신들을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대에 와서 그 문호가 조금씩 풀리면서 외교사절단들이 북경을 살펴 볼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고, 백탑시파 중의 한 사람이었던 홍대용이 직접 북경을 체험하면서 박지원·박제가를 포함한 백탑시파 출신들이 중국에 갈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연행에는 보통 6개월이 소요되었는데, 그 중 한달 이상을 북경에서 머물렀다. 북경을 간 지식인들 사이에는 중국의 명사를 만나고 새로운 서적이 가득 차 있었던 유리창을 방문하는 것이 필수 코스였다.

박제가의 숙원은 1778년에 이루어졌다. 정사 채제공()의 도움으로 박제가는 이덕무와 함께 그토록 소망해 마지 않았던 중국으로 떠났다. 박제가는 채제공의 종사관으로 이덕무는 서장관 심염조의 종사관으로 수행했다. 답답한 조선의 현실을 떠나 중국으로 간 박제가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조선후기 실학자 가운데 중국을 가장 많이 다녀 온 인물이 박제가이다. 박제가는 모두 네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첫 번째 연행 때는 관직 없이 종사관의 신분으로 갔었지만, 두 번째 연행 때부터는 관직에 있으면서 공식적으로 중국 사절단을 수행하였다. 1790년에는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서호수의 종사관으로 유득공과 함께 열하까지 갔다. 네 번의 연행을 통해 박제가는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해 갔다. [사고전서()]의 편찬 주관자인 청나라의 문인 기윤()을 방문하여 교유 관계를 맺기도 했다. 훗날 기윤이 조선에서 온 사신의 인편으로 박제가를 그리워하는 서신을 보내자, 그것을 본 정조는 “기윤의 편지를 보니 박제가는 나라를 빛낼 인재가 아닌가”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기윤은 박제가가 만년에 귀양을 가자 위로와 안부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연행은 1790년 5월 27일 출발하여 북경에서 40여 일 머물다 돌아왔는데, 9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정조는 다시 중국에 갈 것을 명령하였다. 국내 땅도 밟아 보지 못하고 다시 말머리를 중국으로 돌려야 했던 것은 원자 탄생에 대한 건륭제의 축하 인사에 답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년에 두 차례나 중국 사절로 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중국어와 만주어를 동시에 할 수 있으면서 외교적 실무 능력을 갖춘 것이 정조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1801년 주자() 저서의 선본()을 구해오라는 왕명을 받은 사절의 일원으로 북경에 간 것이 그의 마지막 연행이었다. 이 연행에는 유득공도 함께 갔다. 박제가는 1796년 연행의 추억을 정리한 5언 절구 140수 연작의 [연경잡절()]을 지었다. 훗날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암이 박제가가 중국 문인과 교유한 시와 편지 등을 엮어 [호저집()]을 펴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중국 인사만도 172명이었다. 조선시대에 박제가처럼 중국 명사와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박제가가 뿌린 북학()의 씨는 그의 제자인 추사 김정희(, 1786~1856)로 이어졌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통상무역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네 번에 걸친 청나라행을 통해 그곳의 풍속과 제도를 기술한 책이다.
그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조선의 상공업과 농업, 기구와 시설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후대의 북학파로 이어졌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학의()]는 채제공의 도움으로 첫 연행길에 오를 수 있었던 1778년(정조) 9월 29일에 완성되었다. [북학의]의 ‘북학’이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그렇게 된 원인은 우물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누구나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북학의]의 서문을 쓴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작가와 [북학의]의 작가가 마치 한사람인 것처럼 그 뜻이 일치한다고 했다.

“이 책은 나의 [열하일기]와 그 뜻이 어긋남이 없으니 마치 한 작가가 쓴 것 같다. 나는 몹시 기뻐 사흘 동안이나 읽었으나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 직접 본 뒤에야 알게된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연구하고 밤이 새도록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수레를 널리 이용하여 국내 상업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견고한 선박을 만들어 해외 여러 나라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적인 쇄국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상품유통의 발전, 그리고 통상무역은 박제가가 가진 경제관의 주요 골자였다. 당시로서는 몹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는 조선의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이를 해상무역으로 발전시키면 국력은 자연히 강성해 질 것이고 백성의 생업도 안정될 것으로 본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론은 현실을 개선하고 이를 위해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데 그 초점이 있었다. 박제가의 이용후생() 정신은 박지원, 홍대용 등 백탑시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박지원은 "이용을 이룬 다음에 후생할 수 있고, 후생을 이룬 다음에 정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굶주림을 해결하지 않으면서 법도와 예의만 찾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제가를 포함한 백탑시파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북벌()은 이미 시대과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들은 조선을 ‘소중화()’라 여기며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로 상공업을 천시했다. 박제가는 중화문화의 계승자는 조선이 아니라 청이라 보았고, 사농공상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당시로는 매우 급진적인 사고였다. 이런 그의 주장 탓에 박제가는 '당괴(- 중국병에 걸린 자)'라는 지탄도 받았다.

박제가의 개혁안은 경제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실질적인 방안이었지만,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업적 이익이나 물욕을 경계했던 유학적 가치관에 반하는 개혁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분과 문벌이 중요했던 조선시대 기득권에 강한 도전장을 내밀었던 박제가는 1801년 노론 벽파의 미움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다. 2년 7개월간 귀양살이를 마친 뒤 1804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05년 4월 2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