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이라는 이름은 조금 낯설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 이귀(李貴, 1557∼1633)가 좀 더 친숙하기 쉽다. 이귀는 김류(金瑬, 1571∼1648)와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해 성공시킴으로써 조선 후기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이다. 인조대 이후 조선의 내정(內政)에서는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거의 독점했으며, 외교에서는 숭명배청(崇明排淸) 노선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시백의 출세는 아버지의 공훈에 적지 않게 힘입은 결과였다. 그는 과거를 치르지 않았고 그래서 중년까지 이렇다 할 세속적 경력이 없었지만, 4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참여한 인조반정으로 인생을 역전시켰다. 그 뒤 79세의 노령으로 별세하기까지 이시백은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두 번의 호란이었다. 조선은 모두 패배했지만, 그는 그 난국을 수습하는 데 중요하게 공헌한 인물이었다.
가문적 배경
이시백은 자가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인조반정의 핵심적 공로자로 정사(靖社)1등공신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찬성을 역임한 이귀의 맏아들로 1581년(선조 14) 10월 11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동(仁同) 장씨(증 참판 장민〔張旻〕의 딸)고, 동생은 이시담(李時聃, 1584∼1665. 충주목사 역임)ㆍ이시방(李時昉, 1594∼1660. 공조판서ㆍ판의금부사 역임)이다.
그의 가계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6대조가 세조∼성종 때 판한성부사(정2품) ㆍ영중추부사(정1품) 등을 역임하고 좌리(佐理)4등공신ㆍ연성(延城)부원군에도 책봉된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의 하나다. 증조는 이기(李巙, 첨지중추부사. 좌찬성 추증), 조부는 이정화(李廷華, 영의정 추증)로 주목할 만한 경력은 없었지만, 자손들의 출세로 높은 관직에 추증되었다.
조용했던 젊은 시절
어렸을 때 이시백은 감성이 풍부하되 판단력이 또렷한 아이였던 것 같다. 네 살 때 개미들이 흰 벌레를 뜯어먹는 것을 보고 벌레가 가여워 울었다거나, 6세 때 집이 가난해 기르던 개를 팔아야 하자 무척 슬퍼하면서도 할머니를 봉양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수긍한 일들은 따뜻한 마음과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음을 보여준다(송준길, [동춘당집], <이시백 시장(諡狀)>). 이 예화에서는 그의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읽을 수 있다.
자라면서 그는 서인의 주요한 인물들에게서 배우고 교유했다. 8세 때는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에게 수학했는데, 성혼은 그를 자식처럼 아끼면서 “이 아이는 훗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좀더 커서는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스승으로 모셨다.
가장 가까운 벗은 조익(趙翼, 1579∼1655. 좌의정 역임)ㆍ장유(張維, 1587∼1638. 영의정 역임)ㆍ최명길(崔鳴吉, 1586∼1647. 영의정 역임)이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가리켜 사우(四友)라고 불렀다. 모두 출중한 명사인 스승과 친구들의 면모는 이시백의 인품과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방증일 것이다. “이시백은 벼슬 없는 선비인데도 교유하는 상대가 모두 명사고 그를 믿고 사랑하니, 무엇을 수행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이항복은 말했다.
그와 그의 집안은 광해군 때 침체했다. 당색에 따른 정치적 이유였다(앞서의 가난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이시백이 과거를 치르지 않고 40대까지 유생으로 지낸 것은 타인의 권유와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 시기는 정확치 않지만, 최유원(崔有源)이라는 인물이 그를 낭관(郎官)에 천거하려고 하자 이항복은 시대가 적절치 않다면서 만류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아버지가 최기(崔沂)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이천(伊川)으로 귀양 가자 이시백은 가족들과 함께 평생 동안 은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인조반정의 성공
그러나 그와 그 가문에는 곧 중요한 변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인조반정이었다. 이귀는 유배지에서 용암(龍巖)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바위를 보고 시를 지었다.
아, 용이여. 그 덕이 어찌 쇠퇴했으리 吁嗟龍兮德何衰
물속에 오래 누웠으니 세상이 모를 뿐이네 長臥波心世不知
제갈량이 융중에서 늙는다고 비웃지 마시오 莫笑隆中諸葛老
조용히 세 번 찾아올 날 어찌 없으리 慇懃三顧豈無時
이시백은 아버지에게 화답했다.
그때 한의 국업이 쇠퇴한 것 부끄럽고 한스러워 愧恨當年漢業衰
돌로 모습 바꿔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네 變形爲石不求知
깊은 못에 숨어서도 자주 고개 돌리며 深潭入處頻回首
부질없이 융중에서 꿈 깰 때 생각하네 空憶隆中覺夢時
어렵잖게 알 수 있듯이, 제갈량의 은거와 그뒤의 활약을 자신들의 처지에 빗댄 내용이다. 이귀는 맏아들의 시를 보고 “부자간의 지기(知己)라고 할 만하다”면서 매우 기뻐했고, 막내 아들 이시방과 함께 반정을 계획해 결국 성공시켰다.
앞서 말했듯이 인조반정은 조선왕조 전체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이시백의 일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靖社)2등공신ㆍ연양군(延陽君)에 책봉되었다. 불편한 정치적 환경 때문에 포의(布衣, 베옷. 벼슬이 없는 선비의 비유적 표현)의 유생으로 지내던 42세의 중년에게 찾아온 거대한 변화였다.
출세와 호란
두 차례의 호란이 상징하듯이, 인조의 치세는 격변과 수난의 연속이었다. 첫 사건은 즉위(1623년 3월)한 지 10개월 만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이었다(1624년 1월). 반정에서 중요한 공로를 세웠지만 2등공신에 책봉되고 평안도에 배속된 것에 불만을 품고 거병한 이괄은 황해도 황주(黃州)ㆍ마탄(馬灘. 예성강 상류)에서 관군을 격파하며 남하했다. 인조는 공주(公州)로 몽진(蒙塵, 임금이 급박하게 피난함)했다.
그러나 관군은 2월 초순 안현(鞍峴. 지금 서울시 종로구 무악재 일대)에서 승리하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반군은 동요했고, 부하 장수들이 이괄을 죽이고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시백은 협수사(協守使)로 정충신(鄭忠信) 등과 안현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반정에 이어 무재(武才)를 다시 한번 입증한 이시백은 그 뒤 순탄하게 승진했다. 그는 수원 방어사(防禦使. 종2품)에 임명되었는데, 군사를 잘 훈련시켜 정묘호란(1627년. 인조 5) 때는 그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동작나루로 가서 인조를 강화도로 피난시키는 데 공로를 세웠다(다른 군사들은 정오쯤 도착했지만, 그는 날이 새기도 전에 왔다). 치적도 뛰어나 당시까지 수원을 가장 잘 다스린 인물로 꼽힌다고 평가되었다([이시백 시장]).
1629년(인조 7)에는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기도 했지만, 곧 양주목사(정3품. 1630년. 인조 8)ㆍ강화유수(종2품. 1631년) 등의 외직에 임명되었다. 1633년(인조 11) 2월에는 아버지 이귀가 별세해 삼년상을 치렀다. 1635년에 탈상한 뒤에는 중앙의 요직인 병조참판(종2품)에 제수되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는 수어사(守禦使. 종2품)를 겸임해 남한산성의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호란의 조짐은 일찍이 인조 11년 무렵부터 감지되었으므로 무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발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시백은 55세였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 7월에 이시백은 남한산성에서 야간훈련을 실시하고 군사들을 격려했다. 국왕이 산성의 형세와 방어 상황을 묻자 그는 “참으로 천연의 요새지만 성첩(城堞)이 1600곳이나 되어 군사 5만 명이면 충분하고 4만 명이면 빠듯하다”면서 “군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고 보고했다. 병자호란의 패배는 총체적인 문제와 결부된 것이어서 산성의 군량이 넉넉했다면 항복하지 않았을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이런 이시백의 판단은 곧 정확히 들어맞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농성할 때 그는 서성장(西城將)을 맡아 이서(李曙)ㆍ구굉(具宏)ㆍ신경진(申景禛) 등 당시의 주요 장수들과 함께 방어에 앞장섰다.
대신의 일생
이시백은 그 뒤 별세할 때까지 내내 핵심적인 대신의 위치를 지켰다. 인조대에는 병조(1637년 및 1643년)ㆍ형조(1642년)ㆍ공조(1645년)ㆍ이조판서(1649년. 인조 27) 등의 요직을 역임했고, 효종이 즉위하자 정승에 올라 우의정(1650년. 효종 1)ㆍ좌의정(1651년)을 거쳐 영의정(1655년. 효종 6)에 올랐다. 조정을 대표해 청에도 네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왔다(진하사〔進賀使. 1642년〕, 진주사〔陳奏使. 1650년〕, 사은사〔謝恩使. 1652년 및 1653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중신의 일생이라고 말할 만한 경력이었다.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1638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척화신(斥和臣)으로 지목되어 청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했는데, 친아들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탄로나 여산(礪山. 전라북도 익산)으로 귀양갔다(1641년에 풀려나 총융사로 복귀했다). 1644년에는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기도 했다. 그와 동생 이시방이 군사 행동을 합의한 내용이 적힌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반이 진압된 반년 뒤에 발견된 서류인데도 종이와 인장이 너무 생생하다는 의심스러운 정황과 국왕의 신임 때문에 큰 고초를 겪지는 않았다. 1651년(효종 2)에는 김자점(金自點)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는데, 동생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이시백은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강직과 청렴
이시백을 대표하는 면모는 강직과 청렴이었다. 인조 후반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급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숙청일 것이다. 소현세자는 1645년 2월에 귀국한 뒤 두 달만에 급서했는데(4월 26일), 그때 이시백은 64세의 공조판서였다.
인조는 원손이 아니라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을 후사로 삼으려고 했고, 국왕의 강경한 태도에 눌려 대신들은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이시백은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원손을 그대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그 뒤 삼정승을 두루 거친데서 나타나듯이 효종은 즉위한 뒤 오히려 그를 더욱 신임했다.
인조의 믿음도 깊었다. 재위 마지막 해인 1649년 인조는 그를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세자에게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그렇게 대접하라”고 당부했다.
청렴한 면모도 돋보였다. 이시백은 아버지 이귀가 하사받은 집에서 살았는데, 뜰에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중국의 희귀한 꽃이 있었다. 하루는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왕명으로 그 꽃을 캐러 오자 그는 그 뿌리까지 짓뭉개고는 개탄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조석(朝夕)을 보전할 수 없는 형편인데, 주상께서 현자(賢者)는 찾지 않으시고 이 꽃을 찾는다니 이 무슨 말인가. 나는 이 꽃으로 주상께 아첨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이 뜻을 주상께 아뢰라.” 그 뒤 국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1652년에 사은사로 갈 때의 일화도 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화려하게 치장한 기생들이 도열하자 이시백은 “병자호란 이후로 서도(西道) 지방의 형편이 여지없이 쇠잔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이런 광경을 보니 매우 이상하다”고 물었다. 서윤(庶尹)은 그동안 사신의 행차에 늘 격식을 갖추지 못해 죄송했기 때문에 자색있는 관비를 뽑아 치장시켰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시백은 감사를 불러 “서윤을 둔 목적이 백성을 사랑해 기르려는 것인가, 사행(使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인가. 이런 시기에 이런 일을 하다니 매우 해괴하다”고 꾸짖은 뒤 즉시 물리쳤다. 산해관(山海關)을 들어가자 중국 사람들은 길을 가득히 메우고 “조선의 어진 정승이 온다”고 칭송했다.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장만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즉시 부들자리로 바꿨다는 일화도 있다.
그밖에도 이시백은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고(1658년), 효종을 여주의 영릉(寧陵)에 모시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659년). 병자호란을 겪은 뒤 병조 소속의 정예 기병과 보병을 선발해 정초청(精抄廳)을 신설한 것도 그였다. 이것은 그 뒤 오군영의 하나인 금위영(禁衛營)으로 발전했다.
별세와 평가
이시백은 1660년(현종 1) 5월 2일에 태평방(太平坊. 지금 서울시 남대문ㆍ을지로 일대)의 자택에서 79세로 별세했다. 자연적인 노령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겠지만, 그 해 1월 동생 이시방의 타계도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이시백은 크게 슬퍼하다가 피를 몇 되나 쏟고 의식을 잃기도 했다. 운명할 때는 나라에 관련된 일만 간절히 당부했고, 집안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시백이 별세하자 궁벽한 시장 골목의 백성들도 모두 통곡했고, 특히 그가 오래 관여했던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군사들은 더욱 슬퍼했다. 그는 완력이 대단했지만 항상 숨기고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두뇌도 뛰어났지만 늘 겸손했다고 한다([이시백 시장]). 추모의 정이 담긴 기록이라는 측면을 감안해도 그가 크고 너른 존경을 받았던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가난한 선비집 같았다는 기록은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시백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박씨부인전](또는 [박씨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소설은 박씨 부인이 남편 이시백을 도와 출세시키고 호란을 극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적 허구다. 이시백의 실제 부인은 초취(初娶) 남원 윤씨(윤진〔尹軫. 참판에 추증〕의 딸)와 재취 창원 황씨(진사 황첨〔黃詹)의 딸〕)였다. 윤씨와의 사이에서는 3남 2녀를 두었고(흔〔忻. 동지돈녕부사〕, 한〔憪. 호조참의〕, 열〔悅. 충훈부 도사〕) 황씨와는 자녀가 없었다. 묘소는 지금 충남 천안 동남구 광덕면에 있다.
두 번에 걸친 호란의 피해와 영향이 조선 사회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측면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시백은 그 어려운 시대에, 특히 국방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국가를 지탱한 중신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졸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비록 질박했지만 일찍이 [소학(小學)]을 수천 번을 읽어 집에 있을 때는 늘 그것으로 자신을 통제했다. 38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삼가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현종개수실록] 현종 1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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