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살 터를 잡는 데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 그 땅에서 생산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위의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그의 저술 [택리지(擇里志)]의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복거(卜居)의 조건으로 삼은 지리, 생리, 산수, 인심 네 가지를 지목한 것이다. 우리 국토를 두루 답사하면서 팔도의 자연과 환경, 인물을 세밀하게 정리하여 250여년 전 조선의 산천을 생생히 복원할 수 있게 한 학자 이중환. 이중환은 국토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우리 산천과 그곳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역사 및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한 남인(南人)의 삶
이중환의 본관은 경기도 여주(驪州)로, 자는 휘조(輝祖)이며 호는 청담(淸潭), 청화산인(靑華山人) 또는 청화자(靑華子)이다. 이중환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생활을 한 명문가로, 당색은 북인에서 전향한 남인에 속한다. 이중환의 5대조 이상의(李尙毅, 1560~1624)는 광해군대 북인으로 활약하였고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에 올랐다. 할아버지 이영(李泳)은 1657년(효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산현감과 이조참판을, 아버지 이진휴(李震休, 1675~1710)는 1682년(숙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안동부사,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진휴는 남인 관료 집안의 딸인 함양 오씨 오상주(吳相冑)의 딸과 혼인해 1690년에 이중환을 낳았다. 이중환은 사천 목씨(睦氏) 목임일(睦林一, 1646~?)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2명과 딸 2명을 두었고, 후처로 문화 류씨를 맞이하여 딸 1명을 두었다. 사천 목씨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남인 집안으로, 장인인 목임일은 대사헌을 지냈다. 실학자로 명망이 높은 이익(李瀷, 1681~1763)은 이중환에게 재종조부(再從祖父)가 되지만 나이는 아홉 살 위였다. 이중환은 일찍부터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익 또한 이중환의 시문(詩文)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익이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跋文), 그리고 이중환의 묘갈명까지 써 준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이익 또한 같은 남인인 목천건(睦天健, ?~?)의 딸을 후처로 맞아 사천 목씨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사천 목씨와 혼맥을 형성한 것은 이중환이 당쟁에 깊이 연루되는 단서가 되게 된다.
1713년 이중환은 24세의 나이로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섰다.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1717년 김천도 찰방(金泉道 察訪)이 되었고, 주서(注書), 전적(典籍) 등을 거쳐 1722년 병조좌랑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722년에 일어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이중환이 살았던 숙종, 경종 연간은 당쟁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서, 정권이 교체되는 환국(換局)의 형태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중환이 속한 남인 세력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크게 탄압을 받았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숙종 후반에는 서인 세력에서 분화한 소론 측과 연계하여 경종의 즉위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소론과 남인들이 정계에 진출하였는데, 노론 세력은 경종이 허약하고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소론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여 1721년(경종1) 김일경(金一鏡, 1662~1724)이 노론을 역모죄로 공격하였고, 뒤를 이어 남인 목호룡(睦虎龍, 1684~1724)이 고변서를 올려 노론 측이 숙종 말년에 세자(훗날 경종)를 해치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노론의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가 처형되고 노론의 자제들 170여 명이 처벌되는 큰 옥사(임인옥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1723년(경종4)에 목호룡의 고변이 무고였음이 판정되면서 정국은 다시 노론의 주도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론에 대한 노론의 강경한 정치 보복의 과정에서 이중환은 목호룡의 고변사건에 깊이 가담한 혐의를 받으면서 정치 인생에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때는 혐의가 입증이 되지 않아 곧 석방되었으나, 노론의 지원을 받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중환은 다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임인옥사의 재조사 과정에서 김일경과 목호룡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였고, 이중환은 처남인 목천임(睦天任)과 함께 수사망에 올랐다. 특히 집안이 남인의 핵심이었고, 노론 세력을 맹렬하게 비판하다가 처형을 당한 이잠(李潛, 이익의 형)의 재종손이라는 점까지 불리하게 작용하여, 1726년(영조2) 이중환은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이중환은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바로 그해에 사헌부의 논계(論啓)로 다시 절도(絶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영조의 즉위라는 정국의 전환기에 이중환은 당쟁의 후폭풍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 후에도 이중환은 정치 참여를 포기할 만큼 당쟁의 상처는 컸다. [택리지]에서 ‘서울은 사색(四色)이 모여 살므로 풍속이 고르지 못하며, 지방을 말하면 서ㆍ북 삼도는 말할 것이 없고, 동ㆍ남 오도에 사색이 나뉘어 살고 있다.’ 거나, ‘보통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가두고, 권세를 부려 영세민을 침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다른 당파와는 같은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며, 동리와 골목에서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이중환의 당쟁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중환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 속에서 전국을 방랑했다. 30여 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는 불우한 신세였지만, 우리 산천의 모습을 정리하고 시대를 살아간 인물과 대화를 하며 아픔을 달랬다. 그리고 불후의 저술 [택리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조선의 산천과 지리, 인물, 역사를 담다
이중환은 30대 후반에 유배된 후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 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택리지]에 담았다. [택리지]를 저술한 정확한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저자 자신이 쓴 발문에서 ‘내가 황산강(黃山江)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어 팔괘정(八卦亭)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신미년(1751년)이라고 기록하여 저자가 61세 되던 무렵에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리서로, 전국을 실제로 답사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이중환은 우리의 산천과 그곳을 살았던 인물들의 역사는 물론,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택리지]는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개인 소장본도 다수 있다.
[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의 네 분야로 나누어져 있다. <사민총론>에서는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민(農工商民)과 갈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사대부가 살 만한 곳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민총론을 앞머리에 쓴 것은 이중환의 사대부적인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중환은 ‘사대부는 살 만한 곳을 만든다. 그러나 시세(時勢)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고 지역에 좋고 나쁨이 있으며 인사(人事)에도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나는 시기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본 저술의 주요 목적이 실세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팔도총론>에서는 우리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개관한 다음, 당시의 행정구역인 팔도의 산맥과 물의 흐름을 말하고, 관계있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팔도의 서술 순서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였다. 강원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누대(樓臺)와 정자(亭子) 등 훌륭한 경치가 많다. 흡곡 시중대,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청초호,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을 사람들이 관동팔경이라 부른다.’고 한 내용과 ‘지역이 또한 서울과 멀어서, 예로부터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 오직 강릉에는 과거에 오른 사람이 제법 나왔다.’고 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에 관한 항목에서는 ‘좌도(左道)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우도(右道)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을 힘쓰지 않는 까닭으로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다.’라고 하였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도와 우도를 나누었는데, 이중환은 경상좌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충청도에 대해서는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ㆍ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로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서 생활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는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다.’고 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경기도에 관한 기록 중에는 강화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다. 강화부의 자연적 조건을 서술한 다음, 고려시대 원나라를 피해 10년간 도읍지가 되었던 것, 조선시대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부로 삼은 내력, 병자호란과 강화도와의 관계, 숙종대에 문수산성을 쌓은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팔도총론> 다음의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조건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의 네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조건인 ‘지리’는 교통이 발달한 곳과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지리가 아니라 풍수학적인 지리를 의미한다. ‘지리를 논하려면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다음에는 들판과 산의 형세를, 이어 흙빛과 물의 흐르는 방향과 형세를 본다’고 기록하였다. 지리에 이어서는 ‘생리’를 살 만한 곳의 조건으로 들었는데,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기름진 땅으로는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 성주, 진주를 제일로 꼽았으며, 특산물로는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임천과 한산의 모시, 안동과 예안의 왕골을 들었다. 세 번째로 ‘인심’을 들면서, 팔도의 인심을 서로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서민과 사대부의 인심이나 풍속이 다른 점을 강조하고, 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는 한편 인심이 정상이 아님을 통탄하였다.
[택리지]에 반영된 이중환의 사상
[택리지] 이전의 지리책은 각 군현별로 연혁,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역원, 능묘 등으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택리지]는 전국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자신의 관찰을 토대로 한 설명과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단순히 지역이나 산물에 대한 서술에 그치지 않고 사대부가 살 만한 이상향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역구분 방식에서도 이중환은 각 지방이 지닌 개성과 질을 중요시하여 생활권 중심의 등질지역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국토를 생활권 단위로 지역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서 생각한 것이 산줄기였다. 각 지역들은 하천을 통해 동일한 생활권으로 연결되지만, 산줄기들은 이 하천유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중환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과 이용에 대하여 자세한 관찰을 하고 있다. 또한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면에서 종전의 지리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또 각 지방의 토지 비옥도와 산물, 수운과 교역 등 상업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폭넓은 식견을 피력하였다. 또한 누구나가 쉽고 흥미롭게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하였다. 이중환은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강조하면서도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의 타락상을 경고하였다. 흔히 영조시대는 탕평책의 시행으로 당쟁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이중환은 전형적인 남인 학자로 영조대 노론 중심의 정치운영에서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택리지]에서는 당쟁에 대해 부정적인 그의 시국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택리지]가 완성되자 여러 학자들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책의 제목이 [팔역지(八域志)],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진유승람(震維勝覽)],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요람(形家要覽)] 등 10여 종이나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택리지]를 필사하면서 제목을 자신의 취향대로 붙인 것이다. ‘동국산수록’, ‘진유승람’ 등은 산수를 유람하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동국총화록’은 우리나라의 물산이 종합되었다는 의미로, 상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형가요람’은 풍수지리에 익숙한 사람이 지은 제목으로 보인다. 다양한 제목은 [택리지]가 그만큼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택리지]가 저술된 18세기 조선사회는 사회경제적 성장과 함께 국학 연구 분야에도 큰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사대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강산 등 우리나라 산천을 여행하는 붐이 일고, 각종 기행문이 기록되었다. [택리지]는 바로 이러한 시기에 국토를 여행하는 시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널리 유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2년이 저물고 2013년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새해에는 [택리지]를 들고 전국 답사에 나서기를 권한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수와 풍물, 인심을 만나면서, 역사와 전통의 멋을 음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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