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명문대에 진학만 해도 주위에서 ‘비결’을 궁금해 한다. 특히나 사교육 없이 혼자 힘으로 해냈다면 유명세는 배가된다. 대학 진학도 그럴진대 그 어렵다는 고등고시라면 어떨까.
한 집안, 2대에 걸쳐 고시 합격자 5명(사법고시 3명, 행정고시 2명)을 배출한 송하성 교수 집안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더구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고시는커녕 대학 진학의 꿈도 꾸기 힘들었을 정도라는데, 그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던 비결은 무엇일까.
◆ 집안에 배움 열정 넘쳐…사교육 ‘노’
송하성 교수는…광주상고,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프랑스 파리 제1대학(소르본대학) 경제학 박사.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 22회 행정고시 합격.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장. 경제기획원 공보담당관. 주미대사관 경제외교관.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교수(현).
‘한 집안 고시 합격 5명!’ 입이 떡 벌어질 얘기지만, 실제 상황이다. 그것도 6남매 중 4남매가 고시 합격생이고, 자녀 세대에서 고시 합격생이 또 한 명 추가됐다.
3대, 4대에 걸쳐 이룬 성과라고 해도 대단한 일일 텐데 2대에 5명이라니, 한 집안에 한 명도 나오기 어렵다는 고시 합격자가 이 집안에선 ‘흔한’ 일이 됐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집안이 대대로 명문가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는 평범한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다 중고등학생이 돼서야 근처 도시로 진학했고 좁은 자취방에서 형제들끼리 부대끼며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고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주인공은 바로 경기대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송하성 교수 집안이다. 장남인 송하성 교수(행정고시 22회)를 비롯해 삼남인 송영천 변호사(사법고시 23회,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현 법무법인 청담 대표), 사남인 송영길 인천광역시장(사법고시 36회), 맏딸이자 다섯째인 송경희 방송통신위원회 전파방송관리과장(행정고시 39회), 그리고 송하성 교수의 큰아들인 송승환 씨(사법고시 49회, 현 군 법무관)가 고시에 합격했다.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송 교수의 큰아들 승환 씨는 그나마 환경적 혜택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전남 고흥 출신의, 그것도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4남매가 몇 년씩 터울을 두고 턱 하니 고시에 합격한 건 뉴스 중의 뉴스였다.
요즘처럼 학벌도 경제력도 대물림되는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테지만, 그 시절에도 가난의 환경이 장애물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논 여섯 마지기 농부의 아들이었으니 경제적으로 궁핍한 건 당연했지요. 또 그 시절엔 ‘더 가난한 사람’과 ‘아주 가난한 사람’만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후에 면 서기가 되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가난의 범주는 여전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고 고시를 본다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었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에게서 가능성을 보셨고 무리하게 6남매 모두를 다 대학에 보내셨어요.
더구나 시골 출신이 대학에 들어가면 하숙비까지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웠는데 말입니다. 4남매가 모두 고시에 붙은 뒤 우리 집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만 이후에도 아버지는 늘 겸손하셨어요.”
부친의 고희연에서 4형제가 함께한 모습. 왼쪽부터 송영건·송영천·송하성·송영길. 가운데 앉은 사람은 아버지.
◆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한 공부, 기적을 만들어 내다
먼저 테이프를 끊은 건 장남 송하성 교수였다. 중학교 시절 벌교에서 다시 광주로 전학을 간 송 교수는 그러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아니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꿈은 그저 금융 계통이나 일반 회사에 취직해 밥이나 먹고사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중에 커서 조그만 구멍가게 주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구멍가게 주인밖에 못됩니다. 더 큰 꿈을 가지십시오”라고 외치는 한 목사의 설교를 들은 것이 인생 반전의 계기가 됐다.
그가 가진 운명의 세 고리, 즉 가난과 평범과 약골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공부를 잘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던 것. 당시 광주상업고등학교에 다니며 전교 60등에서 110등을 오가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광주상고 수석’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후 1년 동안 정통종합영어(현재 성문종합영어)를 통째로 외워버릴 정도로 진짜 독하게,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니 1년 4개월 만에 정말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광주상고의 70년 역사에 기적이 일어났지요.
더 이상 제 꿈은 은행원이 아니었어요. 제일 좋은 대학에 들어가 가족의 생계보다 더 가치 있고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큰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겨났지요. 그렇다고 내가 수재나 천재였던 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한 반에 다섯 명이나 받는 우등상도 받지 못했지요. 운동에도 소질이 없었어요. 내가 축구를 하면 상대팀이 점수를 따기 쉬웠을 정도니까요. 하루는 내가 자는 줄 알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큰아들이라고 태어난 게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어리바리해서 두드려 맞고나 다니니 저걸 어디다 쓸까’하시더군요(웃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형의 모습은 당시 함께 살았던 두 동생(송영천·송영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연히 형이 하는 것처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를 잡았던 것. 게다가 인생의 큰 꿈을 갖게 된 송 교수는 동생들에게도 꿈을 설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바로 아래 동생 영천은 정확하고 칼 같은 면이 있어서 판사가 되는 꿈을 갖게 했고, 영길이는 정치가가 되라고 종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뭔가 그릇이 남달랐어요. 영길이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내가 왜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고가 깊고 컸지요.
누이동생 경희에게는 여성으로서 행정 관료가 되기를 권했고, 지금은 벤처 농업인인 영건이와 홍익대 미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막내 누이 정화에게도 꿈을 설정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줬어요.”
송 교수는 형제들뿐만 아니라 두 아들에게도 꿈을 꾸게 했다. 외교관 시절, 미국에서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4년을 보낸 큰아들에게는 미국은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며 초등학교 때부터 법의관의 꿈을 꾸도록 도와줬고 장사꾼이 되고 싶다는 둘째 아들에게는 이왕이면 세계적인 장사꾼이 되라며 베이징대로 유학을 보내 내년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어디 고시라는 게 꿈만 갖는다고 해서 될 일인가. 송 교수는 “가난한 집에서 고시를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내가 첫 테이프를 끊으니 동생들이 용기백배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제가 거의 독재를 하다시피하며 공부를 안 하면 아이들을 때렸어요(웃음). 내가 그만큼 열심히 하니 명분도 있었지요. 그렇게 동생들이 처음엔 반강제적으로 공부한 면도 없지 않았는데 나중엔 다들 공부하는 게 습관이 돼 스스로들 열심히 했지요.
제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영천이는 사법고시에 6등으로 합격했고, 영길이는 형들이 붙으니 붙지 못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여동생 경희는 체면상 꼭 붙어야 했지요(웃음). 제 아들이 사법고시를 볼 때는 그야말로 부담이 엄청 컸다고 해요. 집안이 고시를 보면 다 붙는 분위기니 떨어지면 무슨 창피냐면서 말입니다.”
<왼쪽 위 사진> 현 인천광역 시장인 동생 송영길과 함께한 모습. <왼쪽 아래 사진> 동생 송영천 변호사(전 서울고법 부장 판사)와 함께. <오른쪽 사진> 고시에 합격한 4남매(왼쪽부터 송하성·송경희· 송영천·송영길)가 고향인 고흥에서 함께했다.
◆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닮아가려는 노력
동생들에게 그토록 엄격한 형이고 오빠였던 건 때로는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위치였던 때문도 있었다. 집을 떠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부모님을 자주 뵐 수 없었던 것.
전화가 원활하지 않았던 그 시절 통신수단이었던 편지를 통해 시골에 계신 아버지와 자주 소통했던 송 교수의 주요 화제는 동생들 걱정이었다. 안부 편지에서부터 크고 작은 소식, 때로는 학비를 보내 달라는 부탁까지 아버지와 6남매가 주고받은 편지가 무수히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남매간에도 편지가 주고받는 게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다른 집안에 비해 가족애가 남다르다. 부친의 회갑 때는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엮어 ‘고흥의 흙과 더불어’란 기념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자신은 물론 형제들이 잘된 건 말보다 실천으로 보여준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고 했다. 한 집안에서 고등고시 합격생 5명이 배출된 원동력이 바로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닮아가려는 노력 때문이었다는 것.
공부는 스스로 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이자 등대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부친 송병수 씨의 학구열 또한 대단해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하며 독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세 아이를 둔 30대 가장의 나이로 지방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평생 역사·일본어·한학·일반상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책을 읽으며 평생 배움의 열정을 자식들에게 보여줬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선구자였어요. 일제강점기 때 방앗간을 경영하며 소지주로 사셨는데 재산을 다 털어 금광 개발을 시도하다 망하고 일찍 돌아가셨지요. 그 때문에 아버지가 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겁니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꿈을 이루는 것도 참 어려웠을 거예요. 저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합니다. 어머니는 기가 센 분이었던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칙주의자라고 하실 정도로 요령도 없고 정도만 걷는 분이었어요.
삶을 통해 감동을 줄 때가 많았지요. 아버지가 농사를 짓다가 후에 면사무소에 다니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한번은 새로운 벼 품종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다른 사람들은 대충 한두 개 세어 보고 보고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아버지는 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어요. 제가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더니 아버지가 벼를 품종별로 다 잘라 놓고 낱알을 일일이 세면서 조사하시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실이 아닌 보고를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셨어요. 그 일로 또 아버지에게 감동했지요.”
살면서 아버지의 반이라도 닮고 싶었다는 송 교수는 가끔 아버지가 집에 와 계시는 동안에도 출근 전에 큰절을 올리고 퇴근해 돌아와 또 큰절을 올릴 정도로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장남이 그렇게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 왔으니 동생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송 교수의 자녀 대에도 좋은 본보기가 된 것은 당연한 이치.
“효도를 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효도를 하려고 노력한 건 사실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을 보면서 자식들도 뭔가 생각하는 게 있겠지요. 그런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좀 약해지는 것 같긴 해요.
제가 아버지와 그랬듯 아들들과도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해요. 여자 친구 이야기도 하고 공부하다가 힘들거나 힘든 순간이 오면 제 경험담을 들려주며 격려도 하죠. 그런데 아무래도 저보다는 아이들 엄마하고 더 시시콜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웃음).”
그는 “우리는 명문가도 아니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생물학적’ 잘난 사람이 많다고 명문가가 되는 게 아니라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사람,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집안이 명문가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사회에 기여하며 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이 시대의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이 꿈이 없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 스스로 큰 꿈을 꾸며 삶을 꾸려왔듯 아이들 역시 목표 대학 진학이 아닌 진짜 자신의 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정·재계, 학계, 종교계 등 150여 명의 인사들이 모여 ‘자꿈모(내 자식 꿈 이루기 모임)’를 결성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다. 무료로 아이들의 꿈을 컨설팅해 주고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기 위한 모임인 것.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삶이 달라진 걸 경험한 제가 바로 롤모델이지요. 제가 그랬고 우리 형제들, 아이들이 그랬듯 많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 꿈의 불을 지폈으면 좋겠습니다.”
<왼쪽 사진> 베이징대에서 유학 중인 둘째 아들 송요한(왼쪽)과 현재 군 법무관인 큰아들 송승환(오른쪽) 씨와 함께한 송 교수. <오른쪽 사진> 송 교수네 가족사진. 송영천· 송영건·송영길·송하성·어머니· 송경희·아버지, 송정화(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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