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 숱한 세월 흘러, / 붉은 누각 우뚝이 /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 가인의 춤 추는 모습 비추었고, / 단청 매긴 기둥엔 /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 전장터로 봄바람 불어 / 초목을 휘어감고 / 황성에 밤비 내려 /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 남아 있는 듯 / 삼경에 촛불 밝히고 / 강신제를 올리네. - 정약용, [촉석루에서 회고]
논개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위는 1779년(정조 3년) 진주 남강 변에 논개(論介, ? ~ 1593)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의기사(義妓祠)를 보수하면서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이 쓴 추모 시이다.
흔히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끌어안고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전공을 세운 의로운 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 직후 바로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출신과 삶, 그녀가 죽인 왜장의 이름 등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임난 직후에는 민간에서만 전해지다가 1620년경에 가서야 마침내 문헌으로 기록되었다.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다. 유몽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미처 그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지 못하고 신분상의 문제로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논개에게 측은함을 느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자신의 문집에 실었다.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논개의 공이 안타까워 이런 글을 썼지만 이로 인해 논개는 오랫동안 그녀의 삶 자체가 묻힌 채 진주의 관기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전반까지 논개는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주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를 보면 당시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상황에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에 통쾌함을 느끼고 승리의 희망 속에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고 결국 왜적을 내몰 수 있는 기운을 준 논개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대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루어졌다. 진주성민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비변사에 건의하여 논개를 기리고 그 자손들에게 포상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1세기가 넘은 상황에서 논개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수소문했지만,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나라에서는 의암사적비를 세워 그녀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의로운 기생이라 하여 의기(義妓)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739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의기사는 그 뒤 홍화보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 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정약용이 논개를 기리는 시를 쓴 것은 정조 초의 일이었다.
근 2세기 간 기생으로 알려졌던 논개는 그간 그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들어서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논개가 2차 진주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최경회(崔慶會, 1532~1593)의 첩이었다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삶을 기리는 [일휴당실기]에 논개로 추정되는 인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부실이란 정실 부인이 아닌 첩을 뜻한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최경회의 첩이었던 여인을 조사하게 되었고 이는 [호남절의록], [호남상강], [동감강목] 등에서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하여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되게 되었다.
논개의 생애
최경회의 첩을 논개라고 상정하고 보면 그녀의 삶과 가계는 대개 이러하였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것이다. 논개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한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장수 현감이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최경회는 해주최씨로 전라도 능주 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성이었다. 진주는 왜병들이 많이 주둔해있던 경상도의 주요성일 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었다. 진주성은 일본입장에서는 꼭 차지하고 싶은 성이었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내어주면 안 되는 성이었다. 1592년 10월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중심으로 관군과 민간인, 의병들까지 합세해 이를 물리쳤다.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매 전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왜군으로서는 진주에서의 패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7월 조선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일본군을 동원한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 반성, 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이때 조선의 중앙정부는 명나라 군이 진주성을 지키는 원병을 보내주지 않기로 하자, 진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의병들과 민간인들은 다시 한번 똘똘 뭉쳐 왜군의 공격을 막았다. 전투는 7일간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많은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왜군의 거대한 병력이 휩쓸고 들어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논개의 남자였던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성안의 민간인과 살아 있는 동물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왜군도 7일간의 전투 동안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큰 손실을보아 진주에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랐다. 그들은 어렵게 진주성을 차지했지만 병력손실이 커,주변 지역 약탈에 그쳤을 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지도 못했고, 조선군이 거점을 부산 방향으로 옮겨가자 이를 막아내느라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논개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왜장의 존재
그렇다면 논개가 물에 함께 빠져 죽은 왜장은 누구일까?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장수가 게야무라 로쿠스케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농민 출신으로 카토 키요마사에게 발탁되어 사무라이가 된 자로서 사무라이가 된 후 이름을 기다 마고베(木田孫兵衛)로 바꾸었다. 그는 카토 키요마사의 중요한 부장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 때 철포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가부키가 있을 정도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인데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함경도에서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일본으로 돌아가 62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대한 기록이 가토 키유마사의 함경도 진출 후에도 계속 나오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기록 후, 그의 이름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점, 일본에 있는 그의 무덤이 가부키의 소재가 된 이후 조성되었다는 점, 그의 죽음에 대한 한 이야기로 조선에서 한 여성의 복수로 죽었다는 것이 있어 논개가 함께 죽은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 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들어와 일본의 어느 건축가가 자신의 땅에서 발견한 게야무라 로쿠스케에 관한 비석에 근거하여 논개의 영정을 모셔가 함께 전시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기생이라고 전해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의 일반 백성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리고 있었다. 논개가 기생이었든 아니었든, 그녀가 죽인 왜장이 왜군의 병력에 손실을 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정자의 역사기록이 그녀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논개의 죽음이 전쟁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일반 백성들에게 전쟁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약하고 미천한 위치에 있던 한 여인의 결연한 행동으로,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은 위안과 위로 속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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