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한국사

정조를 최 측근에서 보필한 최고 실권자 - 홍국영

히메스타 2017. 9. 2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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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제법 많았다. 붕당() 정치의 물고 물리는 권력 다툼 속에 탕평책이 펼쳐지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있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노력과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재들이 있었으며, 문화적 중흥의 기운도 있었다. 이 시대 정치 무대에서 짧지만 크게 활약한 인물로 홍국영(, 1748~1781)이 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대부분에서 그는 정조를 보필하여 개혁을 추진한 인물, 뛰어난 지략으로 정치판을 새롭게 짠 인물 등으로 꽤 비중 있게 등장한다.

그런 홍국영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평가, 특히 그가 출세하기 전 시절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따르면, 홍국영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치가 빠르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자신이 글을 잘한다고 자부했으며, 실제로도 글에 재치가 있고 예리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격이 방종하여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얘기하기를 즐기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했으며 시조와 창에도 능했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들이 그를 질책할 때가 많았고, 명문가에서는 홍국영과 교유하려 하지 않았다 한다.

정치적 친소 관계나 상황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윤색되거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홍국영이 학문에 전념하고 행실도 착실한 ‘모범생’ 사대부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친구들에게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장담하고 다녔다는 이야기에서, 그가 일찍부터 정치적 포부를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굴 잘 생기고 다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는 재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젊은이,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포부도 큰 청년’이었던 셈이다.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 정조의 두터운 신임

홍국영이 그렇게 자신감 넘칠 수 있었던 요인에는 가문적 배경도 있었다. 본관이 풍산인 홍국영 가문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서울에 깊이 뿌리 내린 가문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즉 부마 영안위()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정조의 외조)은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며, 정조와도 멀기는 하지만 12촌 관계가 된다. 또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8촌 관계인 경주 김씨 가문 김면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당고모(5촌)였다. 집이 도성 바깥 서강에 있었던 홍국영은 과거를 보기 위해 도성에 들어왔을 때 김면주의 집에서 기숙했다.

홍국영이 1772년(영조 48) 25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왕 가까이서 일하는 예문관원(사관)이 되고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사서가 된 것에는, 이러한 가문 배경의 영향도 있었다. 영조가 홍국영을 아끼며 ‘내 손자다’라고까지 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 힘입은 일이었다. 그러나 홍국영은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기 주변에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키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정조밖에 없었다. 정조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며,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뜻이었다.

정조가 홍국영을 신임하게 된 까닭은 빠르고 정확한 정세 판단과 정치적 감각 외에, 당쟁에 물들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다. 또한 홍국영은 궁궐 바깥 세상의 실상을 정조에게 알려주는 역할에도 충실했다. 정조가 시중의 여론과 상황을 가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소통 창구가 바로 홍국영이었던 것. 홍국영은 정조의 기대와 신임에 부응하여 외척인 홍인한정후겸(정조의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세력에 맞서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켰다. 즉위 뒤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을 충직하게 보호한 ‘의리주인()’으로 일컬으며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을 휘두르며 스스로 외척이 된 홍국영

홍국영은 177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측근 비서, 즉 승지에 임명되었고 몇 달 후에는 도승지(오늘날의 대통령실장)가 되었다. 정조는 또한 친위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에 설치한 숙위소(宿)의 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하고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도 맡게 했다. 궁 안에 머물면서 왕의 경호부대를 지휘하고 훈련대장으로 군권까지 장악했으니, 국정의 주요 사안은 홍국영을 거치지 않으면 정조에게 보고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홍국영은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했으며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를 물어 숙청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외척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 제거했다. 정순왕대비의 친동생 김귀주도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무너뜨렸다. 외척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을 실행하는 행동대장이 홍국영의 모습이었다. 그런 홍국영은 1778년(정조 2)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원빈(元嬪) 홍씨다.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로써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원빈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서인 세력 특히 노론은 국혼물실(), 즉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정략적 원칙을 지켜왔는데, 홍국영은 이러한 정략을 따랐던 것이다. 원빈이 죽은 다음에도 홍국영의 야심은 그칠 줄 몰랐다.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으로 봉하여,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했다. ‘완’은 전주 이씨, ‘풍’은 풍산 홍씨의 본관을 뜻하는데, 왕실 작호에 어머니 쪽 본관을 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파격이자 홍국영의 야심을 반영한 처사였다.

홍국영의 실각, 자진 은퇴 형식을 빌린 추방

홍국영은 누이 원빈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의 비 효의왕후를 근거 없이 의심했다. 또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는다며 궁궐의 나인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문초했다. 이에 따라 궁궐 내 거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미워하며 적대시하게 되었다.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인 것도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예컨대 홍국영은 숙위대장으로 궁궐에 머물며 일할 때, 아무리 나이 많은 상급 관리가 나타나도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정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177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를 명했다. 홍국영도 정조의 갑작스런 명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법하다. 이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은 곧바로 은퇴의 뜻을 밝히는 소를 올렸다. “저는 7년 간 국가의 일을 맡았는데, 그간 조정의 명령 대부분이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한 번 궐문을 나가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신에게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 자진 은퇴 형식이었지만, 실은 정조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즉시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 동안 군주와 신하의 이러한 만남이 언제 있었던가, 그리고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으나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흑발의 봉조하가 있게 되었다.”

봉조하는 은퇴하는 원로대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함이었다. 죄를 물어 벌주지 않고 자진 은퇴 형식을 취하게 한 것. 정조가 홍국영에게 내린 마지막 은혜였다면 은혜였을까. 외척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정조로서는,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는 홍국영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홍국영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노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한 홍국영의 행태는 지난 날 외척 세력을 척결하는 데 앞장섰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자 왕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탕평 노선을 추구하는 정조의 정치 방향과도 맞지 않았다. 그는 정조의 정치 구상과 행보에서 치워내야 할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쓸쓸하고 허무한 마지막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홍국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국영이 우대했던 노론 산림 인사 송덕상이 나서 홍국영의 은퇴를 방관한 대신들을 비난했지만, 송덕상은 나중에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 홍국영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들은 크게 득세한 반면, 홍국영의 은퇴에 대해 동정하거나 불분명한 태도를 취한 인사들은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홍국영 자신도 결국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이후 홍국영은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며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면서 울분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고 지낸 지 몇 달이 지난 1781년 4월, 홍국영은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울화병이었으리란 추측이 많다. 29살 때부터 32살 때까지 약 3년 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누린 홍국영의 최후는 이렇게 쓸쓸하고 허무했다.

그는 정조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거침없이 반대 세력을 제거할 때까지는 중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도가가 되어 왕위 계승에까지 개입하려다가 철저한 척결 대상으로 급전직하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자기 자신의 권력욕에 희생된 많은 권력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정치와 권력의 무상함, 권력자의 처신, 왕과 신하의 관계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삶이 아닐 수 없다.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지음, 푸른역사)에서 영조와 정조 시대의 정치 상황과 붕당 관계, 다양한 인물들의 부침() 등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