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형(尹元衡, ?~1565)은 조선시대에 권력을 전횡한 대표적인 권신의 한 사람이다. 그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외척(外戚)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권력을 거머쥐고 그것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휘두르다가 결국 실각해 자살하고 후대에 지탄을 받게 된 인생의 명암은 거의 모두 그 조건에서 배태된 현상들이었다.
형식은 내용만큼이나 본질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형식 자체에 그것이 담을 수 있는 내용이 결정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내용보다 더욱 본질적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외척이라는 외형은 긍정적 요소보다는 부정적 함의가 기본적으로좀 더 많이 내재된 조건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사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인 혈연을 최고 권력자와 나누고 있다는 그 조건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크게 내포하고 있다. 외척의 임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그런 가능성의 현실화를 우려하고 차단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그 규정은 다양한 방법으로 위반되거나 예외가 허용되었고, 그렇게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외척들은 대부분 부정적 행태를 자행하다가 불행하게 종말을 맞았다. 윤원형은 한국사에서 그런 외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부침 속의 출세
윤원형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언평(彦平)이다. 증조부는 성종 때 대사헌·형조·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좌리3등공신에 책봉된 윤계겸(尹繼謙)이고, 조부는 윤욱(尹頊)이며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이다.
윤지임은 아들과는 달리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실록은 그가 딸이 왕비가 되었어도 늘 온화하고 검소한 현명한 외척이었다고 상찬했다(중종 29년 4월 14일). 윤지임은 대사간·부제학 등의 청요직을 지낸 이덕숭(李德崇)의 딸과 결혼했는데, 윤원형은 5남 중 막내 아들이었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윤원형의 손위 누이다.
윤원형의 출세는 이런저런 부침(浮沈) 속에서 이뤄졌다. 그는 1533년(중종 28) 문과에 급제했지만, 4년 뒤 당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안로(金安老)에게 파직·유배되었다(1537년, 중종 32). 그러나 그 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곧 재기해 홍문관 수찬(정5품)·응교(정4품)·교리(정5품), 사헌부 지평(정5품)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친 뒤 좌승지(정3품)·공조참판(종2품) 등의 현직에 올랐다.
그러나 두 번째 시련이 다시 닥쳤다. 중종 후반 조정의 정파는 세자(뒤의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慶原大君, 뒤의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을 영수로 삼는 소윤(小尹)으로 나뉘었다. 두 집단의 팽팽한 대립과 균형은 인종이 즉위하면서 일단 대윤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권력을 장악한 대윤은 왕위의 가장 강력한 위협 세력인 소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 인물로 지목된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국면은 곧 급격히 전환되었다.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윤원형은 예조참의(정3품)로 복귀했고, 대대적인 보복을 전개했다. 을사사화였다.
윤원형은 그동안 대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과 결탁해 대윤의 비행을 고변했다. 인종이 위독하자 대윤은 명종 대신 계림군(桂林君)을 추대하려고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 대윤은 대거 숙청되었다.
2년 뒤에도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은 “여주(女主, 문정왕후를 가리킴)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리는 형국”이라는 내용의 격문이 붙은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을 기화로 대윤의 잔당으로 지목된 송인수(宋麟壽)·이약수(李若水) 등을 처형하고 권벌(權橃)·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 등 명망있는 신하들을 처벌했다(정미사화, 1547, 명종 2). 이로써 윤원형은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것이었다.
권력의 전횡
명종이 즉위한 때부터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1565년, 명종 20) 20년 동안 윤원형은 그야말로 권력과 재력을 독점했다. 우선 권력에서 그는 이조판서(1548년, 명종 3)·우의정(1551년, 명종 6)을 거쳐 영의정(1563년, 명종 18)에 올랐다. 그가 행사한 권력의 크기는 [명종실록]에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윤원형의 권력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명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다. 윤원형은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니, 주상의 걱정과 분노가 말과 얼굴에 나타나게 되었다. 내관 중에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宮人)을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에 주상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윤원형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들어갔다. 왕후가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께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크게 꾸짖으니, 주상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군국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오니 주상은 마음 속으로 그를 매우 미워했다 (명종 20년 11월 18일).
재력 또한 엄청났다. 역시 실록은 “뇌물이 문에 가득해 재산이 국고보다 더 많았다”고 적었다. 거기에는 그의 애첩으로 나중에 정경부인에 오르는 정난정(鄭蘭貞, ?~1565)의 탐욕도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요녀의 한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정난정은 부총관(종2품) 정윤겸(鄭允謙)과 관비(官婢) 사이의 서녀(庶女)로 윤원형의 첩실이었다. 그러나 1551년(명종 6) 정실부인 김씨(김안수(金安遂)의 딸)를 쫓아내고 적처(嫡妻)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결국 그녀를 독살하고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올랐다. 그녀는 문정왕후는 물론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승려인 보우(普雨)와도 매우 친밀했다.
실각과 죽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윤원형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 계기는 그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던 문정왕후의 사망이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신하들은 즉시 윤원형을 강력히 탄핵했고, 앞서 보았듯이 그에게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던 명종은 즉각 수락했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다.
종말도 곧 다가왔다. 정난정이 적처 김씨를 독살했다는 고발을 받아 사사될 위기에 처하자 부부가 함께 음독자살한 것이다. 국왕의 외숙이자 대비의 동생이며 영의정이라는 전례 없는 지위를 바탕으로 거대한 권력과 재력을 행사하던 윤원형은 이처럼 실각된 직후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 비율은 다르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자연의 원리처럼,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한 시대에도 퇴행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의도와 결과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시기에 추진된 시책 중에서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서얼허통(庶孼許通) 추진과 불교진흥이다. 전자는 첩의 자녀인 서얼도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려는 시도였고, 후자는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킨 시책이었다. 추측할 수 있듯이, 두 조처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각각 정난정과 보우였다.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본원적으로 외척은 권력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지위를 오용하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본인의 신중한 처신과 사고가 더욱 필요했다. 그러나 ‘척신정치’라는 표현이 집약하고 있듯이, 윤원형은 자신의 누이·부인과 결탁해 권력을 남용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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