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문치주의의 시대로 이해되는 조선시대에도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많았다. 정조는 문무를 겸비한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를 받고 있고, 조식(曺植)은 평시에 칼을 차고 다니며 항시 무(武)와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무신에게 준 칭호) 1등에 책봉된 권율(權慄) 역시 문신의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전략으로 국난 극복에 기여하였다. 장만(張晩, 1566~1629)은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문신이자 장군이었다. 장만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에서 정묘호란에 이르는 시기로 조선이라는 국가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시기였다. 이 시기 장만은 타고난 재능과 과감성으로 정국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특히 국경 방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실무 관료로서 자질을 보이다
장만은 인동(仁同) 장씨로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66년(명종 21) 부 기정(麒禎)과 모 배천 조씨(趙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통진(通津- 경기도 김포의 옛 지명)에서 태어났다. 장만의 딸은 주화파로 유명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에게 시집을 가서, 최명길은 장만의 사위가 된다. 최명길이 국방과 경제에 능했던 실무관료임을 고려하면 장인과 사위 모두가 문무겸비의 재국(才局- 재주와 도량)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1589년(선조 22) 장만은 24세의 나이로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59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예문관의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형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의 정언, 지평 등 언관직을 지냈다. 1598년(선조 31) 장만은 황해도 봉산군수로 나가 임진왜란 후 아직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서로(西路) 지역의 수습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왜구의 축출을 이유로 평안도 지역에는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이들의 횡포가 심하였다. ‘도내의 수령들이 매를 맞고 욕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그러나 장만이 봉산군수로 부임한 후 명나라군과의 마찰은 사라졌고, 봉산을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장만의 외교적 역량과 정치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600년의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는 공주 목사 김상준의 첩정(牒呈- 하급관아에서 상급관아에 올리는 문서)을 인용하여, 병란 이후 침체된 인재 양성을 건의하여 선조의 허락을 받았으며, 1603년 5월 16일 에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알리는 주청부사로 명나라를 다녀와 명나라 예조의 자문(咨文- 공식적인 외교문서)을 전달했다. 1604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전라도 의병장인 김천일의 포상 여부를 아뢰었고, 지역의 군량 확보와 정병 양성 등에 큰 힘을 기울였다. 1605년 6월 전라도를 방문한 어사 민여임(閔汝任)은, ‘관찰사 장만이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 군량을 거의 만여 석이나 마련하였고 정용(精勇)한 기병 5백여 명을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으며 무학(武學)에 있어서는 더욱 열심히 훈련시켜 이미 실재(實材) 1천여 명을 길러 뒷날 유사시에 사용하려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장만이 이미 위기를 대비하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장만은 1607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는 북방에서 여진족이 흥기하여 조선의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 9월 3일 비변사에서는 장만의 보고를 바탕으로 국방 대책을 수립하고 있는 내용이 나타난다. 선조가 승하하기 6개월 전에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된 장만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정세 파악과 이들의 조선 국경 침입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광해군 즉위 이후에도 계속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하게 되었다. 당쟁이 치열했던 당시의 정국에서도 장만은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국방에 꼭 필요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광해군 시대의 국방 전문가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였고 정인홍, 이이첨 중심의 북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북인 정권의 수립은 기존에 권력을 잡았던 서인들과 남인들의 정치적 소외를 가져오게 하였지만, 실무관료의 능력, 특히 국방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장만의 능력은 광해군 정권에서도 계속 되었다. 장만은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와 체찰부사, 병조판서 등 국방 방어와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북방의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 국경에 현실적인 위협이 되고 있어서 능력을 갖춘 국방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대 북방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지속되는 곳이었다. 1608년 9월 21일 장만은 비변사에 북방오랑캐가 가을에 쳐들어올 수 있으니 오랑캐의 정황을 조사하고 방비를 엄격하게 해야 함을 보고하였고, 훗날 청나라 초대황제가 되는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틈이 생겨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1610년 11월에는 여진족 지역의 산천을 그린 지도를 바치기도 했다. 적의 형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이 지도를 옆에 놔두고 유념해 보도록 하겠다.’면서 현장지휘관 장만의 건의에 화답했다. 1611년 장만은 평안 병사가 되었다. 그는 함경도, 평안도 등 국방의 요충지에서 일선 지휘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618년 6월 28일 비변사에서 명나라가 파병요청을 보고하자 광해군은 체찰부사 장만과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군대를 이끌게 하였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측근에서 통역을 한 인물이었고, 장만은 북방 지역의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누르하치와 가까운 곳의 지리와 형세를 지도로 작성한 적이 있었으므로 두 명을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장만은 광해군 정권 내내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이 말년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추진하자 이를 적극 비판하였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받자 장만은 미련 없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통진으로 돌아갔다. 최명길이 쓴 행장(行狀)에서도 “중년에 조강(祖江)의 상류에 집을 짓고서 스스로 ‘이호주인(梨湖主人)’이라고 하였다. 매양 관직에서 물러나면 곧 거기에 나아가 살았다. 비록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감격하여 감히 떨치고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매년 춘추로 휴가를 얻으면, 언제나 배에 노래하는 기생을 싣고서 안개 낀 물결 위를 오르내리며 즐겼다.”고 하여 광해군 정권 말기, 장만이 고향 인근인 조강 쪽으로 들어와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인조 시대와 말년의 장만
장만의 초상화.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으나, 인조 때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장만은 왜란과 호란,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주요직책을 거치며 국방에 대한 탁월한 실무능력을 보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42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폐위되고 북인 세력은 정권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장만은 광해군 정권에서 함경도 관찰사ㆍ형조판서ㆍ병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주로 국경 지역에서 근무한 점, 광해군의 토목 공사를 적극 비판한 점, 사위 최명길을 비롯한 인조반정 주체세력과의 인연 등이 고려되어 다시 관직에 나올 수 있었다. 장만은 반정공신에는 임명되지 못했지만, 반정이 성공한 10여일 후인 3월 25일에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대개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정치인들, 특히 북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정권의 핵심이었던 대북(大北)의 핵심인 정인홍이나 이이첨 등은 처형되었지만, 실무능력을 갖춘 인물은 인조 정권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소북(小北)으로 분류되는 김신국과 남이공이 대표적인 인물로, 특히 김신국은 두 정권에서 거듭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과 경제의 실무관료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장만 역시 정치적 색깔이 옅었던 인물이었고, 그만한 국방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반정 이후에 오히려 도원수의 막중한 직책을 제수받았다.
1624년, 팔도도원수로 평양에 머물고 있던 장만의 정치적 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괄(李适, 1587~1624)이 영변을 거점으로 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반정에 대한 모역과 고변이 인조 초반에 줄을 잇는 상황에서 반정 주체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빚어진 사건이 이괄의 난이었다. 초반 이괄의 반란군에 밀렸던 정부군의 반격이 이어졌다. 장만은 정충신과 남이흥에게 명령하여 밤을 틈타 들어가 안현(鞍峴)을 점령하도록 했다. 관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반란군을 물리쳤고, 이괄은 부하들의 손에 죽었다. 반란이 진압되자, 장만은 군사들을 풀어 농사를 짓도록 돌려보내는 한편 공주의 피난길에서 돌아오는 인조의 수레를 기다렸다. 평양에서 군사를 충돌시킨 지 무릇 17일 만에 사태가 평정된 것이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장만의 공이 절대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진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옥성부원군에 봉하였다. 장만은 공훈을 받는 것에 대해 자신의 공훈을 감하고, 부하인 이시발과 김기종에게 공훈을 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장만의 부하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1625년 장만은 인성군(仁城君- 선조의 일곱번째 서자)을 처벌하자는 조정의 의견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된 후 다시 풍덕(豊德)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장만의 능력은 고향에서의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1626년 장만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전과 같이 체찰사의 직위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이 시기 장만은 호란을 예견하여 수차례 전쟁의 위협을 경고하였고 이에 대비한 국방 정책 수립을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장만이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로 닥쳤다. 후금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조선을 쳐들어오는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후금의 군대는 3만 5천여 병력으로, 순식간에 평안도 의주를 점령하고, 일주일 후에는 얼음을 타고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내려왔다. 후금군은 산성 중심의 방어책을 세운 조선의 방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파죽지세의 진격을 했다. 결국 후금군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고 철수했지만,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나라에 당한 치욕적인 패전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장만은 패전의 책임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장만에 대한 탄핵이 이어지자, 인조는 “장만에게는 진실로 싸울 군사가 없었는데 어찌 죄를 준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러나 탄핵이 계속되자 장만은 연안으로 유배된 후, 유배지를 부여로 옮겼다. 1628년(인조 6) 인조는 다시 장만을 불렀지만, 장만은 고령의 나이(63세)와 오랜 변방 생활이 가져온 질병을 이유로 거듭 관직을 사양하였다. 행장의 기록에는 “공이 변방에서 수고를 계속한지 10여 년 만에 병을 끌어안게 되었고, 이괄의 변란 때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서 밖에서 지내다가 왼쪽 눈이 실명되었다. 여러 차례 환란을 겪다보니, 병은 더욱 고질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항상 문을 닫고서 일에서 손을 떼고자 하여, 나오라고 하여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는 등, 다시 인간 세상에 마음이 없었다.”고 하여 당시의 정황을 언급하고 있다. 1629년에 장만이 손으로 직접 쓴 춘첩(春帖) 또한 스스로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 나이 예순 넷/ 포의(布衣)로서 최고로 영달하였네. 전원으로 물러가는 것이 첫째 소원/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다음 소원이라네. 이 밖에 구하는 것 없나니/ 신명이 내 마음 비춰 주리라.[낙서집] 권5, 부록, <장만행장>
1629년 11월 15일,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시기 국방의 최일선에 서서 국가의 위기를 막은 문무겸전의 관리 장만은 반송리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위인 최명길은 행장을 통해여러 지역의 관찰사와 국경 방어에 힘을 기울인 장인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온 나라 무인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하여 장만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장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왜란과 이괄의 난, 호란으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은 선조, 광해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시기 장만은 지방의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국방에 대한 탁월한 실무능력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특히 광해군치세 15년간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실제 후금과의 전투도 수행되던 시기로서, 이 시기에 장만은 광해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국방 정책과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일선 실무자로 활약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바뀌었지만 장만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국방 문제를 계속 책임졌다. 그만큼 경험이 풍부한 국방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공신에 임명되고, 인조시대 명과 후금의 충돌이 교차하는 국경 지역의 방어에 최대한 헌신했다.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장만은 국경의 최일선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크게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것은 조선시대 인물 및 정치사 연구가 학문적 계보 중심이나 당쟁사 중심으로 흐른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성리학 연구에 치중하거나 당인(黨人)으로 활약한 인물에 비중을 둔 나머지 실제 국방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장만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장만 이외에도 조선중기에는 경제와 국방의 분야에서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헌신한 관료들이 다양하게 배출되었다. 장만을 비롯하여 최명길, 김신국, 이산해, 이항복 등 조선이라는 나라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보다 커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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