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생모.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폐위되는 불운에 처했던 인물. 다시 인조반정으로 명예를 회복한 대비. 바로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를 지칭하는 말이다.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선조가 그토록 바랐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영창대군은 그녀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선조의 기대대로 적장자를 낳은 계비
1600년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가 승하하였다1). 당시 선조는 후궁인 공빈(恭嬪) 김씨와의 사이에서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광해군의 두 아들을 두었으나 의인왕후에게는 소생이 없었기에 적장자의 출산을 바라는 마음이 컸다. 때문에 선조는 계비 간택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간택을 받았다.
- [선조실록] 1600년(선조 33) 6월 27일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태어나 1602년(선조 35) 선조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당시 인목왕후의 나이는 19세, 선조의 나이는 51세로, 당시까지는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왕과 계비였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망 후 3년 뒤에 신위(坤位: 왕후의 지위)를 정한다는 선례를 따르면서도2), 미리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단자(處女單子)를 올리게 하여 14세 이상의 처자들 중에서 간택을 하였다3). 조선 전기에는 계비를 주로 후궁 중에서 승진시키는 방식으로 뽑았지만, 선조는 중종이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를 외부에서 간택한 전례를 따라서 계비를 외부에서 간택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빈 김씨(仁嬪 金氏)는 후궁에서 왕비로 승진될 수 있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선조실록] 1601년(선조 34) 10월 7일
- [선조실록] 1601년(선조 34) 11월 10일
1602년(선조 35) 선조는 이조좌랑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최종적으로 간택하였고4), 이어서 중종이 시행했던 전례대로 친영(親迎) 의식이 거행되었다. 친영은 별궁(別宮)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친히 맞이하여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으로, 요즈음의 결혼식에 해당된다. 선조는 중종대에 친영을 행한 것이 바른 예의를 행한 것이라 평가하고5), 친영의 예에 의거하여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했다. 이때 각종 의물(儀物)들이 호화롭게 준비되고6), 친영을 위한 도로 공사 중에 죽고 다친 자가 10여 명이나 발생하는7) 등 혼례식 준비에 많은 공력과 희생이 있었다. 마침내 선조는 별궁 태평관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8).
- [선조수정실록] 1602년(선조 35) 윤 2월 24일
- [선조실록] 1602년(선조 35) 2월 24일ㆍ4월 29일
- [선조실록] 1602년(선조 35) 5월 27일
- [선조실록] 1602년(선조 35) 7월 12일
- [선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집(谿谷集)] 권10 <墓誌>에는 1602년(선조 35) 7월 13일로, [선조수정실록]에는 윤 2월 24일에 간택하여 왕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목왕후는 궁궐에 들어온 후 선조의 기대대로 출산에 성공했다. 1603년(선조 36)에는 정명공주(貞明公主)를, 1606년(선조 39)에는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특히 선조는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嫡長子)를 얻게 된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궁인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 세자로 있던 상황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야기될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인목왕후의 측근 내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癸丑日記)]에는 이러한 정황이 포착되어 서술되어 있다.
유자신(柳自新: 광해군의 장인)과 동궁의 무리들은 대군(영창대군)이 탄생하시자마자 눈엣가시와 의붓자식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처치할 마음을 먹었다. 그들은 대군께서 무럭무럭 자라나자 큰 변을 일으켜 단숨에 없애버리기 위해 날마다 모의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대군을 불쌍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아 시비하고 매우 박대하였다.[계축일기] 1권
위의 기록은 인목왕후 측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므로 과장이 클 수도 있지만, 당시에 선조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갈등이 컸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선조는 어린 계비가 낳은 적장자 영창대군에게 마음을 기울였고,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자들은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였다. 이른바 정치판의 줄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두 개의 당파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이 그것이다. 그리고 각각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 자리를 잡았다. 선조가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영창대군은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면서, 정국은 일시에 변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직 어린 영창대군 대신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16년간의 위태했던 세자 생활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르면서,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이어 서궁 유폐까지
1608년 광해군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창대군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유영경은 처형되었고,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소북 인사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지만, 광해군은 불안감을 쉽게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점차 성장하고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는 실로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장감이 흐르는 정국 속에서, 이에 더욱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1613년(광해군 5) ‘은상(銀商) 살해 사건’이 그것이다.
문경새재(조령)에서 도적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주모자는 서인의 거물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하여 서양갑ㆍ심우영ㆍ박치인ㆍ박치의ㆍ이경준ㆍ허홍인 등 7명의 서얼들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진술이 나왔다. 박응서와 서양갑의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일)에서 “거사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한 사관(史官)은 이것이 정치적 조작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살피건대 박응서와 서양갑 등은 단지 강도짓을 한 2~3명의 미천한 서얼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박응서가 도적질을 하다가 형을 받고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역모(逆謀)했다고 무고하면서 대군(영창대군)에게 핑계를 대고 스스로 죄를 면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서양갑이 또 자기 가족들을 멸절시킨 국가를 원망한 나머지 대비(인목대비)에게 핑계를 돌리고 김제남을 끌어들여 임금의 뜻을 맞춘 다음 그 옥사를 확대시켜 국가를 전복하고 원수 갚을 계책을 꾸몄으니, 그야말로 응서가 말한 대로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날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원래 그의 속마음이었다.[광해군일기] 1613년(광해군 5) 5월 6일
역모 사건의 죄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에게 돌려지면서, 김제남은 처형되었고 7세의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지시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밀실에 가두어져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죽임을 당하는 증살(蒸殺)로 숨을 거두었다9).
- 이긍익,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 정권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은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법통상 광해군에게는 어머니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관계가 되었다. 결국 광해군은 ‘어머니’ 인목대비를 1615년(광해군 7)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했다. 1618년(광해군 10)에는 실질적으로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西宮)’으로 명칭을 격하시켰다. 당시 인목대비의 폐출을 요청하는 상소가 거듭 올라왔고 광해군은 이를 거절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폐출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서궁(西宮)이 아비를 끼고 역모를 꾀한 정상이 남김없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천자가 봉해준 임금을 폐하고서 자기 소생을 세우려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잡아서 죽일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의리에 입각하여 주청(奏請)함으로써 화란의 싹을 끊어 버려야 일을 가장 공명정대하게 처리함이 될 것입니다10).” 하면서 인목대비를 제거할 것을 청하는 자들도 있었다.
- [광해군일기] 1618년(광해군 10) 4월 18일
경운궁에 있는 인목대비의 비참한 생활상은 [계축일기]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궁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을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그것이 쌓여 악취가 가득하였으며, 구더기가 방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까지 끼어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차례 내인들이 불을 질러 목숨의 위협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생필품도 부족했다.
쌀을 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었다. …… 내인들은 솜도 없이 칠팔 년 동안 겨울을 지냈다. 햇솜이 없어 추워 벌벌 떨었는데 우연히 면화씨가 섞여 들어왔다. 그것을 심어 씨를 냈더니, 두세 해째는 많이 피어 솜을 두어 옷을 지어 입었다. 사계절이 다 지나도록 햇나물을 얻어먹을 길이 없었는데, 가지와 외(참외)와 동화씨가 짐승의 똥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심어 나물 상을 차려먹을 수 있었다.[계축일기] 2권
인목대비는 광해군 정권기 왕실의 최고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경운궁에서 핍박을 당하며 그렇게 모진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10여 년 가량 경운궁에서 힘든 나날을 살고 있었던 인목대비에게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가뭄 끝에 온 단비, 인조반정
1623년 3월 13일 삼경(밤 11시~새벽 1시) 무렵, 광해군 시절 북인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당했던 자들이 결집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는 반정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서인(西人) 세력이 주도한 반정은 성공했다. 반정 성공 후 서인은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왕실 어른인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주인공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 등이 경운궁에 처음 갔을 때 대비는 무슨 사단인지 알지 못하고 왕이 병사를 보내어 변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의심하여 문을 잠그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귀 등이 군사로 하여금 담장을 넘어 문을 열게 하고 들어가서 바깥뜰에서 울었는데, 대비가 내시를 시켜 묻게 하자, 이귀 등이 반정을 일으킨 사유를 모두 아뢰었다. 그리고 대비에게 창덕궁으로 행차하기를 청했는데 대비가 윤허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이에 인조는 친히 경운궁으로 나아갔다. 신료들이 가마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말을 타고 가면서 광해군을 떠메어 따르게 하였다. 이때, 도성 백성들 중에는 환호성을 울리면서 ‘오늘날 다시 성세를 볼 줄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인조는 경운궁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서청문(西廳門) 밖에 들어가 재배하고 통곡하였다. 인조는 엎드려 대죄하였으며, “혼란 중에 일이 많고 겨를이 없어 지금에야 비로소 왔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비록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긴 했지만, 인목대비는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따라서 인조가 인목대비를 뵙고 지시를 받는 등의 행동을 보인 것은, 정통성에 차질이 없도록 함이었다. 인목대비는 인조에게 어보를 전달한 뒤, 광해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아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인조실록]의 다음 기록은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亡靈)에게 제사 지내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인조실록] 1623년(인조 1) 3월 13일
인목대비는 인조의 광해군에 대한 복수가 곧, 자신에 대한 효(孝)를 행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신하들은 뜻밖의 변란이 있을까 걱정하여, 어보가 전달된 다음 즉위식을 곧바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인목대비는 “별당은 선왕께서 일을 보시던 곳이라 이미 궁인으로 하여금 청소를 하게 하였다”하며 별당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이곳은 즉조당(卽祚堂)으로, “인조가 계해년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즉조당(卽祚堂)이 있다11)”라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으로 즉위한 인조는 일을 보며 밤을 새웠고, 신하들은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다음날, 인목대비는 즉위 교서를 내려 반정의 정당성을 공표하였다. 그 앞부분에는 광해군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권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내 비록 부덕하나 천자의 고명(誥命)을 받아 선왕의 배우자가 된 사람으로 일국의 국모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묘(宣廟: 선조)의 아들이 된 자는 나를 어미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광해는 참소하는 간신의 말을 믿고 스스로 시기하여 나의 부모를 형살하고, 나의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주는 등 인륜의 도리라곤 다시 없었다. 이는 대개 선왕에게 품은 감정을 펴는 것이라 미망인에게야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랴.[인조실록] 1623년(인조 1) 3월 13일
이와 함께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를 열거하였다. 그 첫째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자신을 서궁에 유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들었다. 이것은 성리학의 이념을 신념화한 서인들에게 주요한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이어서 광해군대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중립외교를 한 것과 무리한 토목 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 등을 광해군의 악행으로 열거하였다.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광해군은 왕위를 박탈당한 채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인목대비는 다시 왕실 최고 어른으로 복귀하였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핍박한 것을 패륜의 상징으로 부각시키며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인조는 즉위 후 인목대비에 대해 존호(尊號)를 높여주고, 잔치 의식을 자주 베풀면서 광해군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나갔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정국의 중심에 있었던 왕비 인목왕후는 1632년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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